헤롯 왕궁에서 바라본 예루살렘은 평화로웠다.
하늘에는 연한 구름이 가늘게 늘어서 있고 큰길에는 굵은 올리브 나무 잎새들이 푸르렀다.
성전의 둥근 지붕이 금빛으로 빛나며 왕실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것 같았다.
시녀장이 들어와 안나스 제사장이 접견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헤로디아가 즉시 자리를 옮겼다.
“소신을 부르셨습니까? 왕비님!”
퉁퉁한 매부리코 위로 살짝 뜬 날카로운 눈빛이 왕비를 스쳐 지나갔다.
며칠 전에 만났는데 오늘은 또 무슨 일로 불렀는지 불안한 안색이었다.
“나바테아라 왕국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안나스의 붉고 기름진 얼굴에 궁금증이 풀리며 미소가 어렸다.
“국경에 집결했던 군사들이 반 이상 철수했고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모두가 왕비님의 탁월하신 외교적 승리입니다.”
헤로디아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안나스 대제사장님, 지금 이렇게 국방에 문제가 없을 때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왕비가 말을 멈추고 오른손으로 천장에 달린 긴 줄을 잡아당겼다.
시녀장이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제사장님과 내방 집무실에서 말씀을 나눌 테니 누가 오거든 무조건 나중에 다시 오라고 해.
맛있는 차도 두 잔 가져오고….”
안나스는 또 무슨 일로 왕비가 이러는지 두 발짝 뒤에서 그녀를 따르며 성전 금고에 있는 금괴를 더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핑계를 대나 머리를 굴렸다.
오랜만에 들어온 왕비의 집무실은 여전히 제비꽃 향내가 풍겼다.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그녀의 입술이 한 번 굳게 다물어졌다.
“사마리아의 미트라교가 세력이 점점 커지는데 이대로 놔두면 안 되겠어요.
토벌군을 조직해서 하루속히 그들을 일망타진해야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왕비의 말에 안나스가 즉각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성전 경비대 인원이 어떻게 되지요?”
“약 2천 명 정도 됩니다.”
그가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후 계속 말했다.
“5백 명 이상의 병력을 움직일 때는 빌라도 총독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를 공격하려면 우리 경비대만으로는 어렵고, 국경에 있는 군대를 동원해야 하는데 지금 국경에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있는 군대를 뺄 수는 없습니다.”
안나스의 목소리가 그답지 않게 약간 높아졌다.
시녀가 가지고 온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헤로디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정도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국경의 군대를 빼는 일은 쿠데타를 할 때나 있는 일이지요.
우리 경비대 천 명 그리고 로마 주둔군 2천 명이면 충분히 토벌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가이사레아에 있는 로마군이 사마리아를 공격하면 지리적으로 아주 손쉬운 작전이 되겠지만, 빌라도 총독이 승인하지 않을 겁니다.”
이 말을 한 안나스의 뇌리에 며칠 전 왕비가 프로클라 여사를 만난 일이 갑자기 떠오르며 자신의 발언을 조금 수정했다.
“로마의 지시가 있다면 총독도 군대를 동원할 수밖에 없겠지요.”
왕비가 소파에 살짝 등을 기대며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역시 제사장님은 상황 파악이 항상 빠르고 정확하세요.
그래서 제가 중요한 일을 늘 맨 먼저 상의를 드리지요. 호호”
그녀의 칭찬에 안나스가 방향을 잡았다.
“사실 미트라교는 페르시아에서 발생한 종교라 로마는 물론 이 땅에서도 빨리 그 자취를 감춰야 합니다.
그들이 나름대로 자체 경호를 한다고 들었지만, 우리 토벌군이 들어가면 며칠 내에 세겜시를 점령할 수 있을 겁니다.”
“극비리에 토벌군을 조직하여 빠른 시일 안에 세겜시를 점령하는 계획을 세우세요.
주력부대는 로마군을 활용해야 하고 총독의 승인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헤로디아가 안나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덧붙였다.
“인명피해는 어느 정도 각오하고 속전속결을 해야 합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할 때는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약간 몸을 뒤로 젖히고 있던 안나스가 덩달아 자세를 바로 하고 입을 열었다.
“빌립 왕의 땅이 합병되기 전에 우리가 세겜시에 유대교 성전 조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헤롯왕께서 국토를 다윗왕 시대처럼 다시 통합할 수도 있겠지요.”
늙은 제사장의 숨소리가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제사장님께 한가지 여쭤보겠어요.
우리 유대교도 시대에 따라 시민들에게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면서 스스로 계속 발전해야 하지 않을까요?”
치켜뜬 안나스의 검은 눈동자가 왕비의 속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좌우로 바삐 움직였다.
“네, 소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님은 우리 민족의 가장 위대한 왕이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더욱 어려운 질문에 안나스가 대답 대신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눈가에 슬쩍 미소를 흘리며 왕비가 곧 다시 말했다.
“다윗왕이나 솔로몬왕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제 생각은 달라요.
그분들의 업적은 물론 인정해야 하지만 과실도 많았습니다.
한나라의 통치자는 국민들이 안전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외부 침입이나 강도들로부터 보호해 주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를 부흥 발전시켜 온 백성이 풍요로운 생활을 하게 해야 합니다.”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안나스가 박자를 맞춰주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리가 천 년 전 다윗왕 시절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가 무너지고 로마의 내전으로 유대 땅 전체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 세계 정세의 흐름을 읽고 클레오파트라가 탐내던 이 땅을 지키신 분이 누구입니까?”
“헤롯 대왕이십니다.”
제사장이 정답을 말했다.
“이후 40년간 이 땅을 다스리며 갈릴리 지역의 강도들을 물리쳐서 치안을 확보하고, 대규모 토목 건축공사를 일으켜 유대 역사상 모든 백성에게 가장 큰 성장의 혜택을 나눠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안나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왕비의 말이 계속되었다.
“제가 그분의 손녀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서도 그분의 업적은 다윗왕이나 솔로몬보다 위대합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아직도 미래의 지도자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등, 옛날얘기만 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안나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