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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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사도신경 43 화 ★ 내가 믿는 하나님

wy 0 2019.04.26

 

 

저는 하나님이 특정한 국가나 단체나 개인을 위해 있는 분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말하자면 어느 나라가 큰 전쟁에 이기도록 도와 주거나, 어느 나라의 축구팀이 월드컵에서 우승하게 하거나, 우산 장사를 위해 비가 많이 오게 하는 그런 하나님은 믿지 않습니다.

 

우산 장사가 소금 장사보다 더 기도를 많이 해야 하니까요.

 

5백년 전 루터도 시골을 여행할 때 심하게 치던 번개가 두려워서 이 번개를 피하게 해 주시면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맹세한 후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21C 우리가 아는 자연질서는 그런 일을 믿게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짐짓 그런 일을 믿는 척하는 것은 스스로를 기만 하는 일이지요.

 

저는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을 넘어 있다고 믿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가 개념화 할 수 있는 여러 존재 가운데 한 존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만을 위한 부족신이라고는 더욱 믿지 않지요.

 

헤롯 왕이 어린 예수를 죽이기 위해 2살 이하 남자아이를 다 죽이도록 허용하는, 그런 하나님은 믿지 않습니다. 

 

 히틀러가 유대 민족 6백만을 죽인 일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는 근본주의의 하나님, 그런 하나님은 믿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모세의 편을 들어 이집트의 모든 장자를 살해 했다고 믿지 않고, 여호수아를 위해 하늘의 태양을 정지시켜 암몬족을 전멸 시켰다는 그런 하나님은 믿지 않습니다.

 

저는 산속 기도원에서 3일 금식 기도한 어느 식당주인이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기도를 할수록 손님이 많아져 연 매출 100억을 올렸다는 그런 하나님은 믿지 않습니다.

 

이러한 예는 계속해서 더 들 수 있겠지만 이만 생략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시고 혹시 저를 무신론자로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무신론에 대해서도 여전히 완고한 근본주의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신은 없다'라는 확고한 무신론 교리를 전제로 종교 자체를 거부하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을 통하여 기독교에 대한 비난의 수위를 높이는 안티기독교 활동도 이러한 근본주의 행태를 보인다면 근본주의 유신론과 똑같이 하자가 있는 무신론이 될 것입니다.

 

유신론자로서 평생을 지내는 것만큼 무신론자로서 평생을 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제 제가 현재 믿는 하나님에 대해 간단히 말씀 드리지요.

 

하나님을 설명하는 일은 하나님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능력이나 지혜로 설명하는 하나님은 여전히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도덕경의 시작을 “도가도 비상도”라 하였고,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은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하라” 고 했습니다.

 

하지만 21C 기독교광장의 독자를 위하여 신학자로서 제가 배운 몇 가지를 말씀 드립니다.

 

우선 저의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실재적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하나님을 독특한 방식으로 인류에게 나타내셨으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성경 말씀을 진리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제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실재를 나타내셨고 지금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의 의미 속으로 들어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믿으며 메시아라는 뜻을 되새깁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비유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이 주는 물을 마시면서 종족의 벽을 허물었고, 가난한 사람들을 축복하고 위로하면서 물질의 벽을 허물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씀으로 종교의 벽을 허물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을 이러한 삶의 방식으로 초대한 것은 예수님의 온전한 인성이었고, 이것이 기독교가 가르치는 온전한 신성이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서는 종교적 길이라 믿습니다.

 

여기까지 제가 믿지 않는 하나님과 믿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긴 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익진 드림-

 

글을 쓰느라고 안 먹은 피자 한 쪽이 다 식었다.

 

문교수가 컴퓨터를 끄고 모짜렐라 피자를 전자 레인지에 30초를 돌린 후 한 입을 깨무니 치즈가 따끈하게 녹아 나오며 레드 와인 한 잔이 생각났다.

 

칠레산 ‘디아볼라’ 와인을 바닥이 넓은 와인 잔에 반쯤 따라 한 모금 마셨다.

 

블랙 초콜릿 맛과 연한 제비꽃 향기가 느껴지는 부드러운 맛이었다.

 

샤론의 꽃 예수님은 당시에 대단한 시인이었다.

 

대부분의 말씀을 은유와 상징으로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며 시처럼 읊으셨다.

 

기독교 초창기 역사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유대교에서 나와 새로운 종교로 발전하기까지 많은 교리가 만들어졌다.

 

교리가 정해져야 큰 조직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종교의 질서가 잡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지금의 기독교 교리를 보시면 뭐라고 말씀 하실지 알 수 없다.

 

문교수가 평소에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속으로 나직히 읊었다.

 

"신이 와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

 

그의 힘을 스스로 밝히는 그런 신은 의미가 없다.

 

처음부터 너의 내부에서 신이 바람처럼 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너의 마음이 달아 오르고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을 때

 

신은 너의 마음 속에서 창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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