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1181-1226
Q: 성 프란체스코 선생님은 젊은 시절 회심하셨지요?
A: 나는 부유한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어요.
한때는 기사가 되려고 전투에 참여했다가 1년 동안 투옥되기도 했지요.
석방된 후에는 중병을 앓았는데 젊은 나이에 심하게 아파 보니 그동안 내가 누렸던 생활이 허무하다는 것을 느꼈지요.
1년간 투옥된 방
그러던 어느 날 두려운 존재로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던 한센병 환자를 우연히 보게 되었지요.
나는 말에서 내린 다음 사랑을 담아 그를 안아주었고, 그렇게 지난날의 생활을 청산하기로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도께서 내 앞에 나타나 “내 교회를 고치라.”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어요.
그 후 나는 복음의 말씀 그대로 살기로 결심했으며, 부친의 유산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살기에만 전념했어요.
Q: 선생님께서 어떤 말씀을 예수님께 들었는지 좀 더 말씀해 주세요.
A: 1205년 말, 한센병 환자를 만난 뒤에 나는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었어요.
그런 나를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하셨고, 점점 심한 갈등을 빚게 됐죠.
어느 날 황폐한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십자가에 계시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
"프란체스코야, 가서 나의 집을 지어라. 나의 집은 거의 다 무너져 가고 있다."
나는 그 후 철저하게 가난하게 살았고 주님의 말씀대로 그 성당의 무너진 벽돌을 쌓기 시작했지요.
Q: 선생님은무너져가는 교회가 다미아노 성당인 줄 생각하고 당신이 가진 돈과 아버지의 가게 물건을 팔아 성당을 수리 하셨지요.
이에 아버지는 격분하여 아들을 협박도 하고 설득도 해보았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평생 채식을 하셨지요?
A: 네, 인간은 모든 생명에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의 창조물들을 동정과 연민의 품에서 제외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동료 인간들에게도 그렇게 대할 수 있겠지요.
Q: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은 외국 선교도 많이 하셨지요?
A: 1213년 모로코 선교를 하였고, 시리아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기를 원했지만, 배가 파선하고 심한 질병으로 좌절되었으며 모슬렘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그들을 찾아가기도 했었지요.
1219년에는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로 갔다가 술탄 말렉크를 만나 십자군 전쟁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한 대화를 시도했으나 포로가 되었어요.
순교를 하느님을 향한 제일의 덕이라 여기던 나는 각종 폭력과 모욕을 당하며 술탄 앞으로 끌려갔었지요.
나는 술탄 앞에서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밝혔고, 술탄은 일단 나의 말을 경청했어요.
나는 거기서 기꺼이 순교하여 기독교가 이슬람보다 거룩한 신앙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말했고, 술탄은 정말 그것이 실현된다면 제사장들이나 백성들 사이에서 올 혼란이 염려되어 거절했어요.
하지만 나의 태도에 감복했던 술탄은 그저 조용히 물러나라는 뜻에서 값나가는 선물들을 보냈는데, 나는 그 선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Q: 고향 '아시시'에서 선생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11명이 되자 선생님은 복음체의 회칙을 쓰시고 당시 추기경에게 수도회 설립 인준을 요청하셨습니다.
A: 내가 쓴 회칙이 좀 엄격해서 그대로 지키기가 어렵다고 생각한 추기경은 교황에게 보여 드리자고 했어요.
교황은 우리를 만나기 하루 전날 꿈을 꾸었는데, 넘어진 교회를 어느 가난한 수도자가 어깨로 받치고 있는 꿈이었다고 해요.
그 수도자가 나라고 생각한 교황은 회칙을 승인하셨지요.
Q: 선생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사셨지요?
A: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전하라. 너희 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도 가지지 말고 가방도 신도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대로 살려 하다 보니 후세에 내 그림을 보면 늘 맨발로 다니는 모습이더군요.
Q: 선생님은 예수님 이후 가장 예수님을 닮은 분이라 칭송받으십니다.
새들이나 짐승과도 대화하시는 장면이 벽화나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구비오 마을의 늑대를 순종시키는 성인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인 - 장동호 조각가
A: 나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삶과 많이 닮기를 소원했어요.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입으신 양손과 양발 그리고 옆구리 상처까지 내 몸에 나타나게 되지요.
그러니까 내가 세상에서 44년을 살게 되는데 42살 때 그런 이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Q: 네. 그 후 선생님의 뜻을 따라서 작은형제회, 클라라 수녀회 등이 이어져 오고 있으며 심지어 다른 기독교 교파에서도 존경의 뜻으로 성 프란체스코 수도회라는 수도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클라라 수녀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A:‘빛’을 뜻하는 ‘클라라’라는 이름의 성녀는 자신의 삶을 통해 주님의 빛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지요.
1193년 아시시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클라라는 어느 날 기도하기 위해 들른 성당에서 내 설교를 들었지요.
나의 회개 과정을 들은 그녀는 감동했고, 1212년 성지 주일 밤에 집을 떠나 나와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속(補贖, 속죄를 의미함)'의 수도복을 받아 입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을서약했어요
성녀는 이로써 프란치스코회의 첫 여성 동료가 됐지만, 형제회에 여자 수도원이 없어 근방의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머물렀습니다.
클라라는 고정적 수입을 거절하고 복음의 말씀대로 손수 일하면서 절대적 가난을 실천하려고 했지요.
나는 물론이고, 교황과 추기경 및 왕과 귀족들까지도 기도를 부탁하며 자문을 구하러 왔었습니다.
아시시에 이슬람 대군이 쳐들어왔을 당시 클라라는 자매들의 부축 없이는 자신의 몸조차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병들어 있었지만, 수도 가족과 아시시 시민을 구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기도했지요.
기도를 마친 후 성광(聖光)을 모시고 적군 앞으로 나서자, 성광에서 강한 빛이 나와 적군들이 겁을 먹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Q: 선생님의 고향, 이태리의 작은 도시 아시시는 아름다운 성당과 선생님의 발자취를 보러 오는 사람들로 세계적인 관광명승지가 되었고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도 선생님의 성함을 따서 이름을 지었습니다.
또한, 현대 음악가 메시앙이 그의 유일한 오페라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를 작곡하였지요.
4시간 넘게 걸리는 이 음악은 ‘명상적 오페라’라는 새 장르를 개척했다고 평가받는데 그가 직접 쓴 대본의 한 구절은 아래와 같습니다.
“주여, 진리가 없을 때 음악과 시는 나를 당신 앞에 데려왔습니다. 당신의 눈부신 진리 앞에 영원히 서 있게 해 주소서.”
이 오페라는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 나환자에게 입 맞추고, 음악 천사들을 만나고, 새들과 대화하는 등 그의 삶을 그대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인의 죽음 이후,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마지막 합창이 등장합니다.
“고통, 나약함, 수치를 딛고 그는 일어선다. 힘, 축복, 환희 속에…”
찬란한 금관, 미친 듯한 전율의 글리산도, 폭포처럼 쏟아지는 종소리와 징소리….
그것은 부정의 부정, 죽음의 죽음, 곧 삶의 긍정이었습니다.
작곡가 메시앙은 성 프란체스코를 자기 친구처럼 느낀다고 말했지요.
이분도 새를 좋아했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요한계시록의 환시를 보았다고 합니다.
위대한 음악가 리스트도 선생님에 대한 음악을 만들었지요.
그의 <두 가지 전설> 중 제1곡 ‘새들에게 설교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라는 곡입니다.
시작부터 피아노 트릴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절묘하게 묘사하며 음악은 종교적 명상으로 이어집니다.
이후 나오는 코랄풍의 상행 선율도 숭고함과 종교적 환희로 전율하는 세기의 명곡입니다.
리스트는 수많은 여성 편력을 접고 만년에 수도사 생활을 하였는데 그의 종교적 깊이가 음악에 그대로 묻어나온 듯합니다.
Q: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어떤 말씀을 주위 사람들에게 당부하셨는지요?
A: 1226년 봄, 몸이 몹시 아팠던 나는이제 하나님께 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유언을 남겼는데 "나의 회개와 복음적 소명에 대해 주님께 드리는 뜨거운 감사와 지극히 높으신 분이 친히 홀로 형제회를 창설하셨다"는 내용이었지요.
나는 초창기의 완전한 가난, 단순, 겸손을 회상하며 특히 육체 노동에 대한 기쁨을 회상했어요.
모든 형제가 어떤 일에든 종사하고, 일할 줄 모르는 형제는 일을 배우기를 권면하였지요.
Q: 네,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평화의 기도’를 생각합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씨 뿌리게 하소서.
오, 신성한 주여, 나로 하여금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