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bert Schweitzer 1875 – 1965
Q:박사님은 아프리카 오지에서 활동한 의사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동시에 오르간 연주자, 철학박사, 신학박사로서 많은 분야의 활동을 하셨지요.
A: 나는 루터교 목사의 큰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아프리카에서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설교를 자주 하시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들에게 관심이 많았지요.
군 복무 중 휴가를 집에서 보내던 어느 날 "나는 이렇게 가족들과 행복하게 휴가를 보내는데, 이러한 행복을 나만 누려도 되는가?"라는 생각을 했소이다.
그래서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 속에서 살고 그 후부터는 인류에 대한 직접 봉사 활동으로 들어가자'는 결심을 하고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의학을 공부하여 30세 되던 해인 1905년 의대에 진학했으며 1913년에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 하였소.
Q: 박사님은 채식을 하셨지요?
A: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은 다른 생명체 또한 살려고 애쓴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생명을 유지하고 생명을 고양시키는 것을 선으로, 반대로 생명을 파괴하고 생명에 해를 끼치는 것을
악이라 생각합니다.
후세 사람들이 이러한 나의 생각을 '생명에 대한 외경'이라는 표현을 했지요.
이것이야 말로 도덕의 절대적이고 기본적인 원리지요.
또 어떤 종교도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고 보았소.
Q: 신학박사로서 종교에 대한 생각은 어떠셨나요?
A: 내가 태어난 독일의 알자스는 종교적으로 개신교 신자와 로마 가톨릭 신자가 같이 살고 있었어요.
이들은 교단은 달랐지만 서로 적대시 하지 않았으며 기독교인으로서의 일치를 이루는 에큐메니컬 운동(교회연합
운동)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었소.
이러한 유년시절의 경험으로 나는 다른 종교를 존중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젊었을 때 신학자로서 '역사적 예수의 탐구'라는 책을 썼는데 한 번 읽어보세요.
그리고 내가 살던 동네에 가축과 땅을 거래하는 유대 상인이 있었는데 그는 당시 반유대주의로 인해 마을 사람들에게 힘든 모욕을 받으면서도 전혀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지요.
이를 보고 나는 용서만이 악을 굴복시키고 갈등을 극복하는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소.
Q: 박사님은 아프리카 어디에서 의료 활동을 하셨나요?
A: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현재 가봉 공화국)의 랑바레네에서 의료봉사를 시작했지요.
아내 헬레네는 나와 뜻을 같이 한 후 간호사로 마취 공부를 하였는데 우리 모두 흑인을 위한 의료 사업에 평생을 바치기 위해 주위의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그 곳으로 갔지요.
Q: 지금도 아프리카 오지의 생활이 어렵겠지만 처음 가셨을 때는 참 힘드셨겠지요.
A: 내가 처음 간 것이 1913년인데 의사가 온다는 소문이 나니까 약도 수술 도구도 별로 준비 안 된 상태에서 아침마다 몇 십 명의 환자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오.
그냥 돌려 보낼 수 없어서 가능한 치료만 해주고 임시로 닭장을 개조해서 입원실로 만들어 중환자들을 입원시켰지요.
처음에는 바르라고 준 약을 먹는 환자도 많았고 며칠 간 나눠 먹는 약을 한번에 먹는 경우도 많았어요.
또한 그들은 의술을 마술로 생각하고 나를 주술사로 불렀는데 특히 헬레나가 마취를 하고 수술을 하면 더욱 그렇게 생각했지요.
열대의 원시림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표범의 습격과 독사에게 물리지 않도록 조심 해야 하고 강가의 악어도 무서웠어요.
또 모기는 학질을 옮기고 이동개미의 습격을 받으면 닭 정도는 몇 분만에 뼈만 남지요.
A: 박사님은 당시 유럽에서 뛰어난 오르간 연주자셨지요?
Q: 어려서부터 오르간을 배웠는데 1906년 파리에 바하 협회를 설립 하고 거기서 오르간을 연주했어요.
바하의 음악 25곡을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녹음했고 세자르 후랭크
곡도 녹음 했지요.
바하를 좋아해서 바하에 대한 연구도 했고 파이프 오르간을 설계하고 조립하는 기술도 있었지요.
A: 음악활동만으로 병원 운영이 쉽지 않았을텐데요?
Q: 병원의 기금을 좀 더 모집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돌아왔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오.
그런데 갑자기 내 고향 알사스 지방이 당시 독일의 영토였으므로 독일 사람이라는 이유로 구금되었으며 1917년 7월부터 프랑스 포로 수용소에서 약 1년간 포로 생활을 하는 일도 있었지요.
그 후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자 알사스는 프랑스 영토가 되었고 프랑스 식민지였던 가봉에서 활동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국적을 독일에서 프랑스로 바꿨어요.
이 후 6년간 유럽 각지로 돌아다니며 모금을 한 다음 다시 1924년
아프리카로 돌아갔으나 병원은 부서져 뼈대만 남아 있더군요.
다행히 여러 곳에서 원조금이 들어와 병원은 곧 다시 세울 수
있었습니다.
Q: 의학을 떠나 박사님의 철학관은 어떠셨는지요?
A: 나는 일생 동안 현실에 근거한 보편적 도덕 윤리를 찾고자 하였으며, 또한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게 하고자 노력하였지요.
내가 한 아래와 같은 말이 나의 사상을 집약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나는 여러분 개개인의 운명을 모릅니다만 이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 정말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섬김이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하여 깨달은 사람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Q: 생애의 마지막까지 아프리카에 계셨지요?
A: 1차 대전 후 아프리카로 돌아갔는데 나를 돕기 위하여 의사와 간호사들이 그곳으로 자원하여 오기
시작했지요.
이 후 한센병 환자 거주지도 추가로 세웠고 정신장애인들을 위한
의료시설도 만들었습니다.
나의 이러한 활발한 활동은 36명의 백인 의사, 간호사 그리고 다수의 원주민 직원들의 봉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병원운영에 필요한 돈은 3년에 한 번 꼴로 유럽으로 돌아와 연주회를 열어 번 돈과 저서의 인세, 강연으로 받은 돈과 기부금으로 충당되었지요.
Q: 마지막으로 박사님 말씀 중 한마디를 인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