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은 나를 건강하고 상쾌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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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가상 인터뷰

wy 0 202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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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 Nikolayevich Tolstoy 1828 - 1910

 

Q: 선생님은 요즘 한국에서 말하는 소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셨지요?.

A: 나는 백작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모 밑에서 자랐는데 가정교사에게 여러 교육을 받으며 풍족한 생활을 하였소.  

어머니가 2살 때 돌아가셔서 모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고 20대에는 난봉꾼으로 살았다오. ㅎㅎ

감수성 풍부한 낙천적인 성격과 엄격한 자기 반성의 퓨리탄적 경향이 내부에서 항상 충돌하고 있었네.

 

Q: 선생님은 채식을 하셨지요?

A: 하루는 우리 집에 누나가 놀러 와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야채밖에 없는 식탁에 대해서 대단한 불만을 토로하였지.

그래서 다음에 그녀가 왔을 때 내가 살아있는 닭과 칼을 준비하고 누나에게 이렇게 애기하였네.  

“누나, 고기가 그렇게 먹고 싶다면, 직접 죽여요."

 

Q: " 만약 어린아이에게 사과와 산 닭을 줄 때 어린아이가 사과를 먹지 않고 닭의 목을 비틀어 죽여서 그 고기를 먼저 먹는다면 나는 육식을 하겠다"라는 말씀도 하셨지요.

A:  사람은 먹기 위해 동물을 죽이지 않고도 건강할 수 있어요.

 따라서 사람이 고기를 먹는다면 그는 단지 그의 입맛을 위해 동물의 생명을 빼앗는 데 참여한 것이지.

 

Q:  선생님은 대 문호이면서 만년에는 신약성경을 따로 해석 하실 정도로 종교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A: 나는 카잔 대학을 중퇴하고 농지경영에 몰두했지만 실패하였소.

이 후 코사크(자치적인 군사공동체를 형성한 농민집단)에서 군인생활을 했으며 크림 전쟁에 종군하기도 하였지.

두 번 서유럽 여행으로 서구 문명의 문제점을 본 후 돌아와 농민 교육에 힘을 쏟았고 1862년 소피아와 결혼했으며 이후 충실한 창작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네.

그러나 한편으로 내심의 허무감, 생의 무의미함이라는 관념이 나의 마음을 지배하였으며 살아있는 기쁨을 위협하는 죽음의 공포가 늘 나를 흔들었지.

 1879년에 쓰기 시작한  <참회>는 나의 회심의 극적 표현인데, 이후 종교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네.

 산상 수훈에 의거해서 오프로시체니에(oproshchenie, 간결한 농민적 생활을 보내는 것)를 이상으로 한 퓨리탄적이며

 아나키즘적 성격이 농후한 그리스도교 (소위 톨스토이 주의) 교리를 정립했지.

 그 교리 중에서 <악에 대한 무저항>이라는 생각은 나의 정신적 제자인 간디에 의해서 결실을 맺었다고 볼 수 있네.

 

Q: 선생님은 차이코프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를 듣고 눈물을 흘렸으며 평생 방대한 작품을 쓰면서도 하루 2-3시간씩 쇼팽,모차르트, 멘델스존의 음악 등을 감상하셨지요.

그리고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과 이름이 같은 소설,<크로이처 소나타> 1890년 발표하셨습니다.

선생님의 금욕적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소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A: 이 소설에서 나는 타락한 결혼제도와 비뚤어진 성에 대한 비판을 하였는데 액자소설(이야기 속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액자처럼 끼어들어 있는 소설) 형식으로 구성된 작품이었네.  크로이체 소나타를 들으며 충동적 살인을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21C에는 나의 엄격한 윤리관 혹은 도덕관을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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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산책 중 찍은 사진

 

Q: 선생님은 일부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문제점을 말씀 하셨지요?

A: 옳지 않은 종교 지도자들은 이미 지나간 시대에도 존재하였고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오

그들은 스스로 키운 교리를 입으로는 떠들지만 워낙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지.

어느덧 그러한 교리를 인류의 과거와 미래 생활에 관한 초자연적 계시로 만들고, 그저 형식적 실행만을 요구하고 있지.

 이것은 극히 넓은 의미에서의 바리새인, 즉 형식적 의례로 얻어지는 내세(來世)의 행복만 추구하는 잘 못 된 가르침이네.

또 어떤 자들은 눈에 보이는 인생 이외에는 인생의 모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기적을 부정하며 인생은 그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동물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지.

이들 두 가지 종류의 가짜 교사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인간 생활의 근본적 모순에 대한 서투른 몰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늘 시비해 왔으며 또 지금도 서로 다투고 있네.

이들 두 가지 교리는 오늘날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인간의 참된 행복으로 이르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할 수 있지.

 

Q: , 마치 지금 우리 시대를 직접 보시는 듯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선생님은 1901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 당하셨지요?

A: 내가 '부활'을 발표했을 때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 감독기관인 종무원에서 파문당했는데 감옥에서 성찬예배를 드리는 장면이 트집을 잡혔소.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을 사는가?' 등에서 당시 러시아 교회의 위선을 비판하여 교회에서 미움을 받고 있었는데, <부활>의 한 장면을 트집 잡아서 나를 파문 한 것이네.

이 사건은 러시아 민중들이 항의시위를 벌일 정도로 러시아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에 대해 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단순한데, 교회는 그렇지 않다." 며 유감을 표시하였지.

또 러시아 정교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나 자신의 교회 사상을 발전시켜 <신의 왕국은 그대 안에 있다>(1894)라는 에세이에서 자세히 설명했다네.



Q:
실례지만 선생님은 부인과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으셨지요?

A: 우리가 결혼 할 때 나는 34살 소피아는 18살이었소.

당시에 나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어렸을 때 집안 하녀와 낳은 아이였지.

내 원고는 대단히 악필이라서 교정 일은 언제나 소피아가 해주었소.

종교와 일치하는 삶에 강한 열정을 느낀 나는 거름통을 들면서, 나도 농부다! 라고 할 정도로 농민들의 생활을 동경했었지.

결국 <인생론>, <참회록>등을 저술하고 스스로 재산과 영지를 포기하고 농부처럼 일하는 금욕적인 삶을 선택했소.

소피아는 농민으로 돌아가겠다는 나의 폭탄선언을 듣고 어이없어 했네.

더구나 소작농들도 나에게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비웃었으니까

나는 1881년 이전에 쓴 모든 소설의 저작권을 소피아에게 양도했지만 그녀의 화는 풀리지 않았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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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와 부인 소피아

 

 나는 철학, 과학, 예술 등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지 못한 후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로 귀의하여 예수님의 생각과 말씀의 뜻대로 살려 노력했지.

그러다 보니 나의 작품에 대한 저작권의 포기 발표 등은 소피아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그 녀와 분쟁이 끊이지 않았네.

게다가 한 집에서 기거를 같이했던 나의 사상적 동지인 첼트코프에 대한 소피아의 질투와 증오도 가정생활에 심각한 파문을 일으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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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와 첼트코프 

 

Q: 선생님은 에세이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에서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해 회심하기 전에 쓴 모든 작품을 부정하셨지요.

A: 나는 모든 예술은 사람들의 윤리적인 교화를 도와 사람들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다네. 또한 예술이 가진 사상은 어떤 무지한 사람에게라도 전파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지.

이 기준에 따라 나는 이전에 쓴 자신의 모든 작품들이 보통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헛된 목적으로 쓴 '귀족의 예술'이라고 말했네.

 

Q: 선생님의 작품들은 자연과 인간에게서 볼 수 있었던 일체의 특질을 세밀하고 뛰어나게 묘사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인생과 행복을 어떻게 정의 하셨나요?

A:  인생이란 선에 대한 희구라고 볼 수 있지.

 말하자면 인생의 의의는 선에 대한 노력 속에 있다는 것이오.

 이 목적에서 벗어난 그 어떠한 훌륭한 사상도 일고의 가치가 없으며, 개인적인 행복과 참된 행복과의 차이를 구별 할 수 있어야 하네

동시에 그 행복의 목표를 현재에 두고 있어야만 하지.  

즉 사상이 바로 실행이어야 하고 그래서 사랑은 미래의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의 활동이네

 

Q. 인생의 의의는 선에 대한 노력 속에 있군요

선생님의 마지막 소설 하지무라드를 다시 읽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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