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 Nikolayevich Tolstoy 1828 - 1910
Q: 선생님은 요즘 한국에서 말하는 소위 ‘금수저’ 를 물고 태어나셨지요?.
A: 나는 백작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모 밑에서 자랐는데 가정교사에게 여러 교육을 받으며 풍족한 생활을 하였소.
어머니가 2살 때 돌아가셔서 모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고 20대에는 난봉꾼으로 살았다오. 하하.
감수성 풍부한 낙천적인 성격과 엄격한 자기 반성의 퓨리탄적 경향이 내부에서 항상 충돌하고 있었소.
Q: 선생님은 채식을 하셨지요?
A: 하루는 우리 집에 누나가 놀러 와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야채밖에 없는 식탁에 대해서 대단한 불만을 토로하였지.
그래서 다음에 그녀가 왔을 때 내가 살아있는 닭과 칼을 준비하고 누나에게 이렇게 애기하였소.
“누나, 고기가 그렇게 먹고 싶다면, 직접 죽여요."
Q: " 만약 어린아이에게 사과와 산 닭을 줄 때 어린아이가 사과를 먹지 않고 닭의 목을 비틀어 죽여서 그 고기를 먼저 먹는다면 나는 육식을 하겠다"라는 말씀도 하셨지요.
A: 사람은 먹기 위해 동물을 죽이지 않고도 건강할 수 있어요.
따라서 사람이 고기를 먹는다면 그는 단지 그의 입맛을 위해 동물의 생명을 빼앗는 데 참여한 것이지.
Q: 선생님은 ‘대 문호’이면서 만년에는 신약성경을 따로 해석 하실 정도로 종교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A: 나는 카잔 대학을 중퇴하고 농지경영에 몰두했지만 실패하였소.
이 후 코사크(자치적인 군사공동체를 형성한 농민집단)에서 군인생활을 했으며 크림 전쟁에 종군하기도 하였지.
두 번 서유럽 여행으로 서구 문명의 문제점을 본 후 돌아와 농민 교육에 힘을 쏟았고 1862년 소피아와 결혼했으며 이후 충실한 창작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내심의 허무감, 생의 무의미함이라는 관념이 나의 마음을 지배하였으며 살아있는 기쁨을 위협하는 죽음의 공포가 늘 나를 흔들었지.
1879년에 쓰기 시작한 <참회>는 나의 회심의 극적 표현인데, 이후 종교에 몰두하기 시작하였소.
산상 수훈에 의거해서 오프로시체니에(oproshchenie, 간결한 농민적 생활을 보내는 것)를 이상으로 한 퓨리탄적이며
아나키즘적 성격이 농후한 그리스도교 (소위 톨스토이 주의) 교리를 정립했지요.
그 교리 중에서 <악에 대한 무저항>이라는 생각은 나의 정신적 제자인 간디에 의해서 결실을 맺었다고 볼 수 있어요.
Q: 선생님은 차이코프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를 듣고 눈물을 흘렸으며 평생 방대한 작품을 쓰면서도 하루 2-3시간씩 쇼팽,모차르트, 멘델스존의 음악 등을 감상하셨지요.
그리고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과 이름이 같은 소설,<크로이체르 소나타>를 1890년 발표하셨습니다.
선생님의 금욕적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소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 표지
A: 이 소설에서 나는 타락한 결혼제도와 비뚤어진 성에 대한 비판을 하였는데 액자소설(이야기 속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액자처럼 끼어들어 있는 소설) 형식으로 구성된 작품이었소. 크로이체 소나타를 들으며 충동적 살인을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21C에는 나의 엄격한 윤리관 혹은 도덕관을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톨스토이 박물관에 있는 타자기
Q: 선생님은 일부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문제점을 말씀 하셨지요?
A: 옳지 않은 종교 지도자들은 이미 지나간 시대에도 존재하였고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오.
그들은 스스로 키운 교리를 입으로는 떠들지만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지.
어느덧 그러한 교리를 인류의 과거와 미래 생활에 관한 초자연적 계시로 만들고, 그저 형식적 실행만을 요구하고 있지요.
이것은 극히 넓은 의미에서의 바리새인, 즉 형식적 의례로 얻어지는 내세(來世)의 행복만 추구하는 잘 못 된 가르침이네.
또 어떤 자들은 눈에 보이는 인생 이외에는 인생의 모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기적을 부정하며 인생은 그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동물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지요.
이들 두 가지 종류의 가짜 교사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인간 생활의 근본적 모순에 대한 서투른 몰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늘 시비해 왔으며 또 지금도 서로 다투고 있어요.
이들 두 가지 교리는 오늘날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인간의 참된 행복으로 이르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Q: 네, 마치 지금 우리 시대를 직접 보시는 듯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선생님은 1901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 당하셨지요?
A: 내가 '부활'을 발표했을 때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 감독기관인 종무원에서 파문당했는데 감옥에서 성찬예배를 드리는 장면이 트집을 잡혔소.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을 사는가?' 등에서 당시 러시아 교회의 위선을 비판하여 교회에서 미움을 받고 있었는데, <부활>의 한 장면을 트집 잡아서 나를 파문 한 것이오.
이 사건은 러시아 민중들이 항의시위를 벌일 정도로 러시아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에 대해 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단순한데, 교회는 그렇지 않다." 며 유감을 표시하였지요.
또 러시아 정교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나 자신의 교회 사상을 발전시켜 <신의 왕국은 그대 안에 있다>(1894)라는 에세이에서 자세히 설명했다오.
Q: 실례지만 선생님은 부인과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으셨지요?
A: 우리가 결혼 할 때 나는 34살 소피아는 18살이었소.
당시에 나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어렸을 때 집안 하녀와 낳은 아이였지.
내 원고는 대단히 악필이라서 교정 일은 언제나 소피아가 해주었소.
종교와 일치하는 삶에 강한 열정을 느낀 나는 거름통을 들면서, 나도 농부다! 라고 할 정도로 농민들의 생활을 동경했었지요.
결국 <인생론>, <참회록>등을 저술하고 스스로 재산과 영지를 포기하고 농부처럼 일하는 금욕적인 삶을 선택했소.
소피아는 농민으로 돌아가겠다는 나의 폭탄선언을 듣고 어이없어 했네.
더구나 소작농들도 나에게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비웃었으니까…
나는 1881년 이전에 쓴 모든 소설의 저작권을 소피아에게 양도했지만 그녀의 화는 풀리지 않았소. 하하.
톨스토이와 부인 소피아 1903
나는 철학, 과학, 예술 등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지 못한 후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로 귀의하여 예수님의 생각과 말씀의 뜻대로 살려 노력했지요.
그러다 보니 나의 작품에 대한 저작권의 포기 발표 등은 소피아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그 녀와 분쟁이 끊이지 않았소.
게다가 한 집에서 기거를 같이했던 나의 사상적 동지인 첼트코프에 대한 소피아의 질투와 증오도 가정생활에 심각한 파문을 일으켰지.
톨스토이와 첼트코프 1905
Q: 선생님은 에세이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해 회심하기 전에 쓴 모든 작품을 부정하셨지요.
A: 나는 모든 예술은 사람들의 윤리적인 교화를 도와 사람들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소.
또한 예술이 가진 사상은 어떤 무지한 사람에게라도 전파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이 기준에 따라 나는 이전에 쓴 자신의 모든 작품들이 보통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헛된 목적으로 쓴 '귀족의 예술'이라고 말했소.
Q: 선생님의 작품들은 자연과 인간에게서 볼 수 있었던 일체의 특질을 세밀하고 뛰어나게 묘사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인생과 행복을 어떻게 정의 하셨나요?
A: 인생이란 선에 대한 희구라고 볼 수 있지요.
말하자면 인생의 의의는 선에 대한 노력 속에 있다는 것이오.
이 목적에서 벗어난 그 어떠한 훌륭한 사상도 일고의 가치가 없으며, 개인적인 행복과 참된 행복과의 차이를 구별 할 수 있어야 하지요.
동시에 그 행복의 목표를 현재에 두고 있어야만 하오.
즉 사상이 바로 실행이어야 하고 그래서 사랑은 미래의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의 활동이지요.
임종 직후의 톨스토이 1910 11 17
Q. 인생의 의의는 선에 대한 노력 속에 있군요.
선생님의 책들을 다시 읽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