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hard Wagner 1813-1883
Q: 바그너 선생님, 선생님의 음악은 열정적인 팬이 많습니다.
‘바그네리안(Wagnerian)’이라는 고유명사로 불릴 정도지요.
A: 나의 작품 중에는 정교하고 화려한 오페라 곡이 많소이다.
나는 음악을 ‘총체 예술’(Gesamtkunstwerk)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발전시켜 나갔는데, 이러한 철학은 내가 26년 걸려 만든 네 개의 오페라 연작 ‘니벨룽의 반지’에 잘 드러나 있지요.
Q: 네, 선생님은 채식을 하셨지요?
A: 나는 불교 사상을 접한 뒤 동물의 도살을 반대했고 채식을 강하게 주장했어요.
1881년에 쓴 에세이에는 인류 문명이 부패하기 시작한 것은 육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적었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인류의 구원이 채식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었소.
Q: 히틀러도 채식을 했다는데 그가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요?
A: 그가 내 음악을 좋아했고 채식을 간혹 한 것은 사실일 것이오.
그러나 그가 채식을 해서 원래 없었던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지요.
Q: 선생님의 일생은 상당히 파란만장하셨습니다.
A:나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소. 19살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고 50이 될 때까지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피곤한 삶을 살았소.
어려서는 극작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음악은 단순히 내가 상연하고 싶었던 대본을 꾸며줄 수단으로만 생각했었는데,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곧 음악을 정식으로 공부하기로 했지요.
이후 나는 ‘미나’라는 여배우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결혼 몇 주 후에 어느 군인과 야반도주해 버렸지. 그런데 그 군인은 얼마 후 그녀를 떠나 버렸다네…. 난 미나를 다시 맞아들였어요.
우리는 빚쟁이들을 피해서 파리로 도주했고, 주로 다른 작곡가의 오페라를 편곡해 주면서 어렵게 지냈소.
그곳에서 작곡가 리스트(Franz Liszt)와의 만남은 나의 음악 인생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어요.
리스트와 바그너
그러다가 3년 후 독일에 돌아온 나는 당시 유행한 무정부주의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영장이 발부되는 바람에 다시 스위스로 도피하여 12년간의 망명 생활을 시작했지요.
Q: 스위스 취리히에서 많은 작품을 만드셨지요?
A: 나는 거기서 극심한 궁핍에 시달렸고 독일 음악계에서 고립되었으며 심한 피부병까지 얻게 되었지요.
그러나 이 기간에 ‘미래의 예술작품’이라는 나의 수필이 나왔는데, 음악, 춤, 시, 시각 예술, 무대 기술 등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종합예술작품으로서 오페라의 비전을 제시했어요.
그리고 나의 대표곡 중 한 곡인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이때 쓰였고, 또 계속 만든 음악 단편들이 나중에 나의 대작 ‘니벨룽의 반지’가 되었소.
니벨룽의 반지 4부 '신들의 황혼'
Q: 선생님은 오페라의 대본과 가사 그리고 음악을 모두 직접 쓸 뿐 아니라 무대 연출의 상세한 부분까지 지시함으로써 단순한 작곡가를 넘어 소위 ‘총체 예술’을 창작하는 천재였습니다.
특히 대작 "니벨룽의 반지"는 4일에 걸쳐 장장 16시간 동안 공연되는 대하드라마 오페라입니다.
어떤 내용인가요?
A: 작품은 중세의 신들, 평범한 인간들, 하류 노동계층이 함께 사는 세상에서 그 모두가 부, 힘, 그리고 성이라는 세 가지 욕망에 휘말려 죄를 범하고, 이를 속죄하지 못함으로써 종말을 자초하는 거대한 장편 드라마라고 할 수 있어요.
작품 제목에도 등장하는 '반지'란 라인강 물속에 잠겨 있던 금괴를 하층민 꼽추가 훔쳐서 만든 마술반지를 의미하는데, 이를 탐내는 신들의 총수 '보탄'이 세상을 통치하려고 반지를 강탈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지요.
Q: 역사상 가장 많은 글의 대상이 된 분은 예수님이고 2위는 셰익스피어, 그 다음이 선생님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글이 2000년 동안 모였고, 셰익스피어가 필명을 날린 지 400년이 흐른 것에 비하면 이제 탄생 약 200년 정도밖에 안 된 분이 그 순위에 언급이 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랍습니다.
선생님은 음악가이면서 동시에 많은 글을 쓰셨고 철학자들과도 교분이 많으셨지요.
A: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동안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는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라고 했지요.
또 이후 니체와 만났고, 우리는 곧 친구가 되었소.
니체와 바그너
니체는 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첫 책인 "비극의 탄생" 은 나에게 헌정되었어요.
나중에 그는 나를 비난하는 글도 쓰긴 했지만….
그가 한 말 ‘아모르 파티’(Amor fati - 운명을 사랑하라)가 한국에서 노래로 크게 유행할지는 몰랐소.
Q: 선생님의 인생은 국왕 '루트비히 2세'가 취임하면서 극적인 반전을 맞게 되지요?
A: 1864년에 루트비히 2세가 나이 열여덟에 바바리아의 왕좌에 올랐소.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내 오페라의 열렬한 숭배자였기에 나를 뮌헨으로 오게 했지요.
당시 왕궁에 초청된 나는 루트비히 2세를 만난 첫인상을 이렇게 기술했다오.
"그는 너무 고귀하고 당당한 영혼으로 가득하여 조악한 세상의 탁류에 휘말려 사라지게 될까 두렵다.
그는 지금껏 보지 못한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루트비히 2세 1845~1886
그는 나의 빚을 거의 해결해 주었고 새 오페라를 상연시켜 주었지. 그 덕분에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뮌헨 왕립 극장에서 1865년에 큰 성공을 거두며 초연되었소.
Q: 나중 일이지만, 결국 루트비히 2세는 세상의 탁류에 휘말려 살해당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지요.
여하튼 오랜 기간 고생하시며 만드신 작품들이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선생님은 젊은 여인과 두 번째 결혼하시지요?
A: 맞아요. 나의 두 번째 아내는 나의 후원자이자 유명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의 아내, '코지마 폰 뷜로'였소.
코지마는 나의 음악 선배 리스트의 딸이기도 했는데 나보다 24살 연하였지요.
코지마 바그너 1837-1930
리스트 선생은 나를 오래전부터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지만, 자신의 딸이 나를 만나는 것은 싫어했지.
1865년 4월에 그녀는 나의 아이를 낳았고, 우리는 아이 이름을 '이졸데'라고 지었어요.
우리의 애정 행각은 뮌헨에 추문으로 떠돌았지요. 그러던 중에 나에 대한 루트비히 2세의 과도한 지원은 사람들의 반발심을 불러일으켰소.
심지어 나를 싫어하는 은행장이 내가 은행에서 찾으려던 돈을 모두 동전으로 내줘서 마차가 가득 찼던 일도 있었지.
여론이 악화하자 국왕 루트비히는 결국 나에게 뮌헨을 떠나라고 말했소.
나는 스위스의 루체른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빌라로 가게 되었는데 이후 코지마는 남편과 이혼 하고 1870년 8월 나와 정식으로 결혼하게 되지요.
Q: 네 사실 선생님은 많은 열성 지지자도 있었지만 강한 비판의 대상도 되셨지요.
반유대주의적인 글, 여성 혐오적인 발언, 나치즘과의 관계도 회자 됩니다.
A: 나는 새로운 총체 예술을 만들었고 반음계 조성을 썼는데 음악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며 뜨거운 찬반 논란을 불러 일으켰소.
특히 나와 브람스는 당대에 쌍벽을 이루는 음악가로서 결국 각자의 추종자들이 크게 파벌화되는 양상까지 보였지.
그리고 히틀러가 내 음악을 좋아하게 될 거란 사실을 당시에 내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나의 작품을 가지고 독일 민족주의를 강조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지.
일례로 나는 오페라 "로엔그린"의 배경이 독일이 통일된 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독일 국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이것은 니체가 나중에 나와 절교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네.
그런데 내가 죽은 뒤 아내인 코지마가 1920년대에 히틀러와 공식적으로 만나 사진도 찍고 친분을 쌓았소.
이후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바그너 특별연주회’를 열어 나의 후손들을 초청했고, 그렇게 나는 더더욱 나치와 밀접한 음악가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지.
히틀러와 나란히 걷고 있는 위니프레드(바그너의 며느리)
게다가 내가 악극에서 다룬 소재들은 대부분 게르만의 신화와 전설들이었다는 점도 나치가 내 작품을 오용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오.
특히 유대인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학살하면서 나의 음악을 틀었다는 점은 아마 음악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음악 오용의 사례로 남을 것이오. 이는 진실로 통탄할 일이었소.
Q: 네, 참으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인류 역사에 다시는 없어야겠습니다. 선생님은 만년에 바이로이트에 오페라 하우스를 세우시지요.
A: 나는 1872년에 스위스 지역을 떠나서 독일 남동부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소.
그리고 내 악극을 상연할 극장 건립을 추진하여, 마침내 1876년 바이에른의 소도시 바이로이트에 극장을 완성했지요.
바이로이트 극장
극장 개관기념으로 대규모 악극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초연하였는데, 전 유럽의 명사들이 몰려와서 일대 성황을 이루었소.
Q: 네, 사실 저는 니체와 코지마의 관계도 궁금하지만,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또 꺼냈다간 오늘 댁에 돌아가지 못하실 듯하여 이만 줄이겠습니다.
결혼식을 했던 사람이라면 대개 이 곡을 한 번쯤은 들었지요.
https://www.youtube.com/watch?v=HUpineaywOI
오페라 ‘로엔그린’에서 신부가 입장하면서 나오는 곡, 저는 이 음악을 들으면 늘 가슴이 떨립니다.
감사합니다.
바그너와 코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