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njamin Franklin 1704-1790
Q: 안녕하세요.
선생님이 벌판에서 연을 날리며 전기를 실험하시는 글을 교과서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께서 피뢰침을 발명하고 전기의 방전과 번개에 관해 연구하셨지요.
A: 네, 당시 사람들은 번개가 그저 ‘빛만 내는 무서운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번개도 전기가 아닐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지요.
1752년 비바람이 심한 어느 날 밤, 나는 연줄 끝에 열쇠를 매달은 뒤 하늘로 날렸어요.
전기가 통하는 열쇠를 이용하여 번개가 전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실험했지요.
드디어 번개가 치자 열쇠에 불꽃이 튀기 시작했답니다.
이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번개도 전기라는 사실을 확신했지요.
나중에 알았지만 나는 무척 운이 좋았어요.
당시 벼락을 맞아 사망할 뻔했는데 맨발인 아들의 손을 잡고 있어서 감전되지 않은 것이지요.
아래 그림은 누가 그렸는지 아들도 구두를 신고 있네요. 하하.
Q: 단순히 발명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선생님은 펜실베이니아 화로나 피뢰침 같은 일반인들의 생활에서 유용하게 쓰일 만한 물건에 대한 특허권을 포기하셨지요.
선생님은 정치· 외교· 과학. 언론 등 많은 분야에서 업적을 남기시고 미국 헌법의 기초를 닦으셨는데 어려서부터 채식을 하셨지요?
A: 나는 16세 때부터 채식을 했고 17세 때에는 고기, 닭, 생선을 사용하지 않는 요리법을 40가지 넘게 알고 있을 정도로 평생 채식을 즐겼다오.
Q: 미국 100달러짜리 지폐에 얼굴이 나온 분으로 선생님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요.
A: "일생을 살면서 피할 수 없는 두 가지는 죽음과 세금"이라는 말을 내가 했기에, 돈에 내 얼굴을 넣었는지도 모르겠군요.
Q: 네, 여하튼 선생님의 얼굴은 많은 사람에게 친숙합니다.
선생님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평생 정규 교육은 2년밖에 받지 않고 스스로 만든 13가지 덕목을 실천하면서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되셨습니다.
A: 나는 1706년 보스턴의 가난한 양초 제조업자의 15번째 아이로 태어났소.
10살 때 집안 형편으로 인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형의 인쇄소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7살에 필라델피아로 진출하여 본격적인 출판업을 시작하였지.
그리고 절제, 침묵, 질서, 결단, 절약, 근면, 진실, 정의, 중용, 청결, 침착, 순결, 겸손의 13가지 계율들을 정하였소.
조그마한 수첩을 만들어 매일 저녁에 그날 하루의 행동을 생각하고 각 계율과 관련하여 잘못 한 것이 있으면 해당란에 체크를 하면서 반성하였소.
Q: 선생님은 이후 정치가로서 미국 독립 전쟁 때 프랑스의 원조를 얻어내어 독립의 결정적 기여를 하셨습니다.
또한 영국과 협상하는 자리에서 미국 대표로 참석하여 13개 식민지를 하나의 주권 국가로 승인하는 조약을 맺었으며 ‘미국 독립 선언문’을 토마스 제퍼슨과 같이 작성하셨습니다.
그러나 미국 독립 후 어떤 정치적인 중책도 맡지 않으셨군요.
A: 내가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는 계몽주의가 막 시작된 때였소.
중세의 종교적 지배에서 벗어나, 이성과 과학으로 인류를 이끌어야 한다는 사상이 시작되고 있었지요.
내가 만든 발명품 중 지금도 생산되는 '프랭클린 난로'가 있고 '이중초점 렌즈'도 내가 처음 만들었고 시계에 초침도 처음 넣었어요.
그리고 음정을 정확히 내기 위해 유리 글라스에 물을 담아 손가락으로 비비면 소리가 나는 glass armonica도 발명했지요.
Q: 네, 뿐만 아니라 선생님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최소 2곡의 작품을 남긴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먼저 만든 곡은 《해적 검은 수염의 죽음에 대한 발라드》이고, 두 번째 곡은 《현악 4중주 F장조》입니다.
이 곡은 친구의 살롱 중 한 곳에서 연주할 목적으로 작곡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반적인 현악 4중주와는 달리 '바이올린3 + 첼로1'이라는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네요.
이 곡은 모든 악기가 개방현으로 만 연주하게 하였는데, 지금 들어도 상당히 전위적인 구성입니다.
요즘은 유튜브에서 선생님의 곡을 들을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iKz2F0kC2U
Benjamin Franklin - Quartet for 3 Violins and Cello in F Major (ca. 1778)
또 일찍이 실용적인 교육의 중요성을 자각하여 대학을 세웠는데 지금의 "유펜(University of Pennsylvania)"이지요.
A: 나는 어떤 정치적인 직위나 자리에 연연치 않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에 항상 최선을 다했소.
내 묘비에도 간단히 ‘인쇄인 프랭클린’이라고만 썼지요.
공직에 대해서는 내 나이가 초대 대통령 워싱턴보다 26살이나 많아서 그들보다 한 세대 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Q: 네, 선생님의 탁월한 발명들은 피타고라스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버금가고 후배들에게 정치적 자리를 양보하신 것 또한 대단한 일입니다.
그래서인지 선생님의 자서전이 미국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는데 어떤 내용인가요?
A: 내 자서전은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시작하는 데 총 3부로 되어있소.
1부는 어린 시절과 사업의 시작.
2부는 스스로의 마음가짐과 수양 법.
3부는 사회진출과 대학, 공공도서관, 소방대 설립등 공적 사업의 경력과 경험담을 기술하였소.
그리고 나중에 프랑스에서 9년간 미국 대사로 있는 동안 철학자 볼테르와 만나면서 실용적인 학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장면도 나와 있지요.
또 자서전에서 위에 말한 13가지 덕목들에 대해 항목마다 간단한 설명을 했어요.
Q: 그 13가지 중 그래도 선생님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요?
A: 글쎄, 뭐 한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기보다는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늘 잊지 않으려 한 것은 근면이었소.
Q: 선생님은 당시 전통적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지요?
A: 나는 교회에서 장로교 교육을 받았어요.
그 교파의 교리 중에 신의 영원한 의지, 선민 사상, 영원한 형벌 같은 것들은 이해하기 힘들었지요.
일요일은 공부를 하는 날로 정했기 때문에 예배에 별로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종교적인 원칙들을 모두 거부한 것은 아니었소.
예를 들어 신이 존재한다는 것, 신이 가장 기뻐하는 일은 선을 베푸는 일이라는 것 등은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소이다.
나는 모든 종교를 존중했고 다른 사람의 종교에 대한 경외심을 건드리는 논쟁을 피했지요.
예배에 자주 나가지는 않았지만, 필라델피아 장로 교회에 매년 기부금을 보냈는데 그 교회 목사가 나를 찾아와서 집회에 나오라고 권면하여 어떤 때는 5주 동안 계속 참석한 적도 있었어요.
Q: 5주 동안이 최장 기록이었나요?
A: 그 목사의 설교가 마음에 들었다면 일요일에 공부하는 것을 제쳐놓고라도 계속 나갔을 것이오.
하지만 그분의 설교는 주로 교리에 대한 설명들뿐이어서 무미건조하고 지루했으며 도덕적인 원칙은 눈곱만큼도 가르치지 않았지.
우리를 무조건 장로교 신자로 만들려고 했는데 나는 좋은 시민이 되지 않고는 좋은 신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었소.
Q: 선생님은 마지막 덕목 "겸손"을 자서전에서 설명하면서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본 받으라"고 하셨지요.
선생님의 말씀 몇 가지를 더 나열하면서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받은 상처는 모래에 기록하고 받은 은혜는 대리석에 새겨두어라.
#수명을 늘리려면 식사를 줄여라.
#신념 만으로 따르는 것은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벤저민 프랭클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