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onardo da Vinci, 1452.4.15~1519.5.2
Q: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은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봉이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로 불립니다.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계획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로서 많은 활약을 하셨지요.
A: 내가 이런저런 공부를 많이 하긴 했지요. 나는 미술, 과학. 의학 분야에 특히 관심이 많았소.
Q: 선생님이 발명하시고 스케치해 놓으신 것들만 봐도 놀랍습니다.
500년 전에 이미 비행기, 잠수함, 헬리콥터, 장갑차, 로봇까지 설계도를 그려 놓으셨네요.
선생님은 채식을 하셨지요?
A: 나는 자연주의자였고 동물과 자연을 관찰하면서 많은 영감을 얻었지요.
부유층들이 기름진 음식과 진수성찬을 즐겨 먹던 시절, 나는 과일, 채소 등을 즐겨 먹었소.
특히 쌀과 야채로 걸쭉하게 만든 수프를 좋아했는데 나만의 건강관리 규칙을 이렇게 적어 놓기도 했소.
“식탁을 떠나자마자 서 있고, 점심을 먹은 뒤에 바로 잠들지 말라. 술은 절제하고, 화장실에 가는 일을 미루지 말고….”
그런데 진실로 인간은 동물의 왕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잔인성이 모든 동물을 능가하기 때문이지요.
인간의 배를 다른 동물의 무덤으로 쓰지 않는 세상이 와야 합니다.
Q: 의학 분야에서도 처음으로 상세한 인체 해부도를 그리시고 동맥 경화가 건강에 큰 문제가 된다는 생각을 하셨지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해부도
A: 나는 어려서 의사가 되고 싶었소.
당시에는 시신을 구하기도 힘들었고 방부제도 발달하지 못했지만, 몇십 구의 시신을 해부하여 인체의 각 부분을 정밀하게 살펴보며 의학도감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어느 시기에는 인간이 인조인간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여 로봇 인간도 구상했었지요.
Q: 정말 대단하십니다.
선생님의 성함은 이탈리아의 빈치 지방에 태어나신 레오나르도라는 뜻인데, 죄송하지만 사생아라는 출생 신분으로 어려서 많은 교육을 받지는 못하셨다고 들었습니다.
A: 나를 낳은 어머니는 당시 20세로서 이름은 ‘카테리나’라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 하녀였거나 농부의 딸이었을 것이오.
아버지는 공증인이었는데, 몇 달 후 직업이 같은 친구의 16세 딸과 정식으로 결혼을 하셨지요.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귀족 가문의 혈통이 아니면 의학이나 약학 공부를 할 수 없었고 대학에도 갈 수 없었소.
그래서 나는 15살에 피렌체에 살던 어느 화가의 견습생으로 들어가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나마 화가가 나 같은 출생 신분이 할 수 있는 일 중 괜찮은 일이었으니까.
Q: 네 만약 선생님이 사생아가 아니셨다면 대대로 전해지던 가업을 물려받아 아버님처럼 공증인이 되셨을 테고, 그랬다면 지금 우리가 <모나리자>를 볼 수는 없었겠지요.
모나리자는 누구였나요?
A: 1503년 여름,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라는 상인이 그의 아내 모나리자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어요.
새집을 지은 후 벽을 장식할 그림으로 자기 부인의 초상화를 원했던 것인데 부인은 1495년 15세에 그와 결혼해서 아이 셋을 낳은 애엄마였었지.
남편이 원한 것은 23세로 아직 젊지만, 모성애 가득한 여인의 모습이었소.
이탈리아에서는 이 그림을 ‘라-조콘다’라고 부르는데, 남편의 이름을 따라 ‘조콘다 부인’이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하고, ‘명랑한 여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그림 속 여인은 전혀 명랑해 보이지 않았소. 나무와 초원, 새들이 있는 정겨운 풍경 앞에 정숙한 부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기대했을 조콘도는 어딘지 무서운 배경 앞에 눈썹 없는 젊은 여인이 앉아 있는 이 그림이 통 맘에 들지 않아 인수를 아예 거절했소.
Q: 아, 그런 사연이 있는 그림이군요.
선생님은 이 그림을 4년에 걸쳐 여기저기 가지고 다니면서 그리셨는데, 이 그림에 담긴 의미를 조금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A: 음, 그림의 여인 뒤로는 아주 먼 풍경이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바위, 땅, 물 그리고 다리 하나가 있소.
오른쪽에는 높은 산과 거울처럼 반듯한 호수가 있어서 마치 높은 곳에 수평선이 하나 있는 모습이지요.
왼쪽 풍경은 오른쪽보다 훨씬 낮게 그려져 있는데, 그래서 오른쪽과 연결되지 않지요.
이 두 부분을 연결하는 것이 중간에 있는 여인의 미소입니다.
자 이제 이 여인의 미소가 무슨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겠소?
Q: 아, 선생님의 해석을 들으니 모나리자가 다시 보입니다만,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A: 아름다움은 무상하다는 의미인지도 모르지요….
.
모나리자의 미소를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장구한 시간을 나타내는 뒷면의 풍경과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미소가 서로 대조되지요.
즉 이 그림은 시간에 대한 명상이라고도 볼 수 있고요…. 다리 아래 흐르는 강물은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지요.
Q: 아, 어떻게 그런 해석이 가능할까요?
A: 이 그림을 연구한 사람들은 여인의 뒤에 그려진 배경이 같은 시기(1503~1504)에 내가 그린 토스카나 지방의 지도와 같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높은 곳의 호수, 물길, 늪지 등이 똑 같은데 이를 보면 먼 과거에 아르노 강변 유역을 만든 지질학적 과정이 어떠했는가를 유추할 수 있지요.
즉, 이 그림의 배경은 인간 존재 이전의 자연과 장구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토스카나 지방의 문명을 만든 배경이지요.
하지만 <모나리자>를 꼭 이런 연구 결과에 따라서 해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오. 사실 19세기부터 이 그림에 대한 신비적 해석이 많이 제시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그림 속 여인을 ‘신비로운 미의 스핑크스’라 불렀고, 또 어떤 이는 ‘16세기의 고급 창녀’로 파악했소.
Q: 모나리자가 눈썹이 없는 것에 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요.
<모나리자>가 단순히 선생님의 많은 미완성 작품 중의 하나라는 설과 당시 넓은 이마가 유행하여 눈썹을 뽑아버리는 여성들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요.
또 2009년에는 프랑스의 미술 전문가가 240메가픽셀의 특수 카메라를 사용하여 분석한 결과, 선생님은 이 그림을 3차원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유약으로 여러 겹을 특수 처리하셨고, 가장 바깥에 그려졌던 눈썹이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화학 반응을 일으켜 떨어져 나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어느 주장이 맞는 걸까요?
A: 사람들이 모나리자의 미소를 신비와 수수께끼의 상징으로 보는데 내가 그 대답을 확실히 해주면 안 되겠지요. 하하.
나는 이 작품을 그릴 때 악사를 불러 놓고 부인의 심기(心氣)를 항상 좋게 함으로써 정숙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이나 편안한 손 등을 표현할 수 있었지요.
Q: 당시 예술가들은 권력과 부를 가진 가문의 지원을 받았는데 선생님께도 여러 후원자가 있었지요. 피렌체에서 이미 유명해진 선생님을 초청한 곳은 이웃 밀라노였는데 선생님이 쓰신 자기소개서가 재미있습니다.
주로 빛나는 예술적 능력을 언급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지요. 선생님은 잘할 수 있는 일 10가지를 제시했는데, 그중 아홉 가지가 성벽파괴를 비롯하여, 장갑차, 박격포, 투석기, 폭약, 운반이 편한 대포, 전투용 사다리 제작하기와 같은 군사기술이었습니다.
A: 하하. 당시 인재에 대한 수요는 이런 식이었소. 군사 기술자가 가장 우대받던 시절이었지요. 하지만 예술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었기에, 자기소개서의 열 번째 항목은 이렇게 적었다오.
“평화 시에는 공공건물이나 개인 건물의 설계와 건축, 물 관리를 할 수 있습니다. 또 대리석, 청동, 점토 등으로 조각상을 제작할 수 있고, 그림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잘 그릴 수 있습니다.”
Q: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실 선생님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으셨고 특히 바이올린 연주를 잘 하셨지요.
1482년 밀라노 궁정에 처음 모습을 보일 때는 작곡도 하고 악기 개량도 할 줄 아는 음악인으로 소개되셨는데, 아쉽게도 작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이룩하신 여러 분야의 천재성은 역사상 피타고라스 선생 외에는 비교될 만한 분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업적을 이루셨나요?
A: 나는 학교라고는 어릴 때 작은 교회 학교에 다닌 것이 전부였지만, 자연을 관찰하고 독서를 즐기며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지요.
특히 메모는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했던 일이었어요. 지금은 절반 정도 없어졌다고 하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1만 3천여 쪽에 달하는 메모를 남겼지요.
뭔가 생각이 나면 즉시 메모를 해두는 습관을 어려서부터 길렀던 것 같아요. 메모에 남긴 아이디어 중에서 실제로 실용화된 것은 많지 않고, 그림도 미완성이 많지요. 심지어는 주방기구와 요리에 관한 메모도 많았어요.
나는 당시 독선적인 지식인들에게 비판적이었고 그들도 나를 단순한 발명가로 치부하며 교육을 받지 못해 가방끈이 짧아 학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깎아내렸어요.
나의 지식은 순전히 관찰과 독서,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조금씩 습득해 나간 것이었죠. 나의 선생은 자연이었어요. 나는 화가는 늘 자연과 대화해야 하되, 때로는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즉 주변의 세계에 대해 지치지 않는 탐구자로서 미술을 과학이나 생활로 간주하고 모든 영역의 통합으로 확대했지요.
Q: "단순함이야말로 정교함의 극치다."라는 선생님의 미술 철학을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기본 디자인으로 삼아서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만년에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아이디어와 작품을 남기셨는데,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놀랍습니다.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이었나요?
A: 나는 자식이 없었고 평생 제자 한 사람과 살았으며 내가 만든 발명품도 대부분 실용화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Q: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말년에 프란체스코 멜치라는 충실한 제자를 두셨지요. 우리가 선생님이 쓰신 노트를 볼 수 있게 된 것도 사실 멜치가 원고를 잘 정리하고 보존한 덕분입니다.
또한 그는 만년의 선생님을 그려서 후대에 선생님의 초상화를 남겨 주기도 했지요.
레오나르도 다빈치 초상화 - 프란체스코 멜치, 1510년 이후
선생님은 어쩌면 새로운 관점에서 생의 비밀을 관조하였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더욱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지금 인류가 누리는 많은 과학적, 예술적 혜택이 선생님의 창조적인 발상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인류가 낳은 최고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