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시우스를 경호실장으로 임명하고 젊은 백부장 몇 사람을 다시 뽑아 경호실을 보강할 필요가 있다.
늙은 늑대의 경호실장 노미우스처럼 너무 정치적이고 머리가 좋은 사람은 비서실은 몰라도 주인의 안위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지키는 임무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하여 전설처럼 아득한 게르만 전장의 마스코트였던 칼리굴라가 이제 황제가 되어서, 그의 오른쪽에는 카시우스 경호실장이 서 있고 왼쪽에는 루브리아가 자주색 의자에서 그의 연설을 듣고 있는 것이다.
루브리아에게 약속한 대로 수많은 로마 시민의 환호를 받으며 그녀 앞에서 황제 칼리굴라가 연설하는 것이다.
“드루실라 님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리며 그가 머릿속 연설을 중단했다.
그리스 여신처럼 반듯한 이목구비에 엷게 화장한 드루실라가 침실로 들어왔다.
“오빠, 오늘은 시장에 나가서 상인들을 만날 시간이 없네요.
그들 중 몇 사람을 파티에 초대할까요?
늦게라도 오라면 좋아할 텐데….”
그녀가 침대 옆에 놓인 긴 안락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제야 칼리굴라가 큰 하품을 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드루실라 앞에 앉았다.
상체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의 가슴은 약간 좁아 보였고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자국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지만 심장이나 건강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고 요즘은 가슴에 난 털을 노랗게 염색해서 머리 색과 맞추었다.
“오늘은 그 사람들에게 신경 쓰기 싫구나. 한 달 전에도 초대했었지.
너무 자주 만나면 신비감이 떨어져요.
늙은 늑대처럼 숨어 있어도 안 되지만….”
말을 끝내고 칼리굴라가 다시 하품을 했다.
“알았어요. 그리고 아그리파 언니가 오늘 못 온다고 연락이 왔어요.
형부와 같이 생선 내장 점을 보러 간다고 하네요.
용한 점쟁이가 뱃속 아기의 운명을 봐주기로 했는데 술 먹고 가면 안 된다면서….”
칼리굴라의 눈이 커지면서 우스꽝스럽게 가운데로 살짝 모였다.
“걔는 아직도 그런 생선 내장 점을 보러 다니는구나.
그럴 시간 있으면 시를 읊거나 음악을 듣는 것이 더 좋을 텐데….
도대체 아그리피나는 점쟁이에게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걸까?”
‘그거야 뻔하지 뭐, 앞으로 이 아이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될 거라는 말보다 듣기 좋은 소리가 뭐 있겠어요’라는 말을 하는 대신 드루실라는 침묵을 지켰다.
황제에 대한 언급은 오빠에게는 절대 하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뱃속의 아이가 그런 운명을 타고났다는 말을 어떤 점쟁이가 한다면 그의 목숨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그런 말을 하는 점쟁이가 너무 많아서 다 죽일 수 없으면 아기를 죽일 것이다.
갓난아기의 사망 원인은 급체나 역병으로 처리될 것이다.
그녀가 별 대꾸를 하지 않자 칼리굴라가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말했다.
“이 시는 어젯밤부터 머릿속에 맴돌던 문장인데 너무 슬퍼서 내가 쓴 시로 발표해도 될지 모르겠어.
한번 들어봐.”
드루실라가 눈가에 매혹적인 웃음을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이 슬퍼서 우는 것인가, 울어서 생명이 슬픈 것인가.
꿀 먹은 벙어리가 말을 못 하나, 벙어리가 꿀을 먹어서 말을 못 하나.
암살을 당해서 우는 것인가, 암살을 못 해서 우는 것인가.
게르만 전장에 내리던 눈발은, 누구의 가슴에 내리는 오늘의 슬픔이란 말이냐!”
칼리굴라가 시가 끝났다는 신호로 눈을 살며시 감았다.
드루실라가 박수를 천천히 서너 번 쳤다.
“정말 슬프네요. 듣는 순간 눈물이 나려고 했어요.
사람들은 *오비디우스가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하지만 오빠의 시를 들으면 더 이상 시를 지을 수 없을 거예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칼리굴라가 그녀가 앉은 긴 의자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짧은 한숨과 함께 그녀의 입술이 칼리굴라의 입술로 향했다.
사라가 시몬 교주를 만나고 온 다음 날 카잔도 이세벨을 만나러 성전으로 갔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황금 성배가 없어졌다는 소문이 크게 나기 전에 속히 미리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미트라교 내부에서도 성배가 사라진 것이 알려지면 그동안 이룩한 업적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모세의 축복이 미트라교를 떠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시간을 더 끌기에는 무엇보다 카잔의 개인적인 인내가 한계에 도달했다.
어서 미리암을 데려와서 그녀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었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여비서가 이세벨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기다리시게 해서 미안해요. 오늘은 갑자기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그녀의 파르스름한 눈이 미소와 함께 호기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카잔이 천천히 입을 열려고 하는데 이세벨이 생각난 듯 먼저 말했다.
“아, 누보 씨가 곧 결혼한다고 들었어요.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우리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뭐든지 말씀하시고요.”
카잔이 고맙다고 말한 후 잠시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이세벨 부교주님, 오늘 제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 두 가지를 상의하러 왔습니다.”
카잔의 콧수염이 가늘게 떨리며 그녀의 눈도 커지는 듯싶었다.
“진즉 말씀을 드려야 했는데… 사실 미리암은… 제 딸입니다.
미리암을 저에게 돌려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카잔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이세벨의 얼굴이 굳어졌다.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는 모습을 감추며 그녀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엉뚱한 말씀이세요. 미리암은 제 딸이에요.”
이세벨의 목소리가 약간 떨려 나왔다.
“한 살 이후부터 우리 미리암을 키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저이고 엄마는 황소 뿔에 찔려서 사망했습니다.”
이세벨이 아무 반박을 하지 않자 카잔의 말이 이어졌다.
“시몬 교주님도 저를 알고 있습니다.
이세벨 부교주님을 먼저 만난 것은 아무래도 어머니로서 키워준 분이 미리암의 장래를 더 염려할 것으로 생각해서입니다.
또 교주님을 만나면 분위기가 딱딱해져서 대화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겠지요.
오래전 저와 아내 사이를 갈라놓은 분이니까요…”
눈을 지그시 감고 아무 말도 안 하는 이세벨의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번쩍 뜨고 카잔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황금 성배를 가져간 것도 당신이 한 일인가요?”
카잔이 이를 앙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비디우스 – 로마 제국 시대의 유명 시인. 즐거움을 노래하는 연애시로 유명함.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도덕 정책을 비판하여 AD 8년 흑해 연안으로 추방됨.
대표작으로 ‘변신 이야기’ '사랑의 기술', '흑해에서의 편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