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녀가 제비꽃 향내 나는 차를 두 여인 앞에 내려놓았다.
“가실 때는 배를 타고 가셨는데 오실 때는 육로로 오셨나 봐요.”
“네. 올 때는 바람이 순풍이 아니라 그랬어요.
여사님도 로마에 가실 때는 배를 타고 가보세요.
뱃멀미만 안 하시면 시원하고 좋아요.
예전에 많던 해적들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요.”
“총독님께서 배를 좀 싫어하세요.
나중에 저 혼자라도 배 여행을 해야겠어요.
황제 폐하는 건강이 어떠신가요?”
“아주 좋으세요. 아직도 언뜻 뵈면 오십 대 초반 같으세요.
저하고 밤새 술을 드시면서 옛날이야기를 하셨어요.”
“어머! 두 분이서만요?”
프로클라의 눈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처음에는 세네카 님과 경호 대장 노미우스 님도 있었는데 나중에는 저하고만 말씀하셨어요.
두 사람은 몇 잔 마시고 일어났지요.”
“왕비님이 그렇게 술이 세시군요. 저는 한 잔만 마셔도 곧 잠이 오는데….”
“그렇기도 하지만 상대방이 보통 분이 아닌데 술 취할 새가 있나요? 호호.”
왕비가 앞에 있는 차를 프로클라에게 권했다.
“아, 그리고 여사님이 부탁하신 서신은 칼리굴라 님께 전했습니다.
드루실라 님께 전달해 주신다고 했어요.”
“감사합니다. 바쁜 여행 일정 중에 신경 쓰시게 해드렸네요.
칼리굴라 님은 별말씀 없으시던가요?”
“네, 총독님과 여사님께 안부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여사님을 잘 기억하고 계셨어요.”
프로클라가 어린 소녀같이 기뻐했다.
“어머, 아직도 저를 그렇게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잊으셨으면 어쩌나 했는데…. 총독님 말씀은 안 하시던가요?”
“총독님도 유대 땅에서 고생이 많으실 거라고 조금만 더 애쓰시라고 하셨어요.”
프로클라가 고개를 숙이며 감격하는 성싶었다.
“저는 이번에 그분을 처음 뵈었는데 대단히 훌륭하신 분이더군요.
언제일지는 모르나 칼리굴라 님이 다음 황제가 되시면 빌라도 총독님은 적어도 이집트의 총독 정도는 문제없으실 거예요.”
헤로디아가 넌지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던져보았다.
“우리야 될 수 있으면 로마로 돌아가야지요. 이집트 총독도 좋지만요.”
“아, 그러시군요. 이번에 황제 폐하와 칼리굴라 님을 뵈니까 두 분이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두 분 모두 제우스신을 무척 좋아하시는데 특히 칼리굴라 님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제우스신의 번개 창을 들고 연극무대에도 나오신다고 해요.”
눈이 동그랗게 된 프로클라를 곁눈으로 보면서 왕비가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그런지 유대교의 신 ‘야훼’가 무슨 신이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야훼’는 신의 이름이 아니라 ‘나는 나다’라는 히브리어 아닌가요?”
“네, 저도 칼리굴라 님께 그렇게 말했더니 참 싱거운 신도 다 있다고 하셨어요. 호호.”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요.”
“그런데 ‘미트라교’에 대해서는 무척 비판적이셨어요.
이란에서 넘어온 종교인 데다 군인들 사이에 인기가 있는 것이 문제이고 특히 사마리아 지역에서 미트라교가 확산되고 있다고 걱정하셨어요.”
“어머, 칼리굴라 님이 그런 내용도 아시고 계시는군요.”
“실은 그전에 황제 폐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그런 사이비 종교는 크게 확산되기 전에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요.
그래야 제우스신과 황제숭배 사상을 더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며 로마의 평화가 더 넓게 퍼진다고 하셨어요.
빌라도 총독님도 황제 폐하의 말씀을 유념하셔야 할 거예요. ”
“네, 제가 그렇게 전해드리지요.
그런데 사마리아 지역은 유대교보다 미트라교가 더 많은가요?”
“그렇다고 할 수도 있어요.
거기 사람들은 말로만 유대교지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우리와 화해할 수 없지요.”
프로클라의 순하고 맑은 눈이 왕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같은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서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대화하면 예전처럼 한 나라로 합칠 수 있지 않을까요? 다시 통일국가로요.”
“좋은 말씀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워요.
두 나라 사이의 주민 감정이 아직도 서로를 극도로 증오하고 있지요.
더구나 미트라교가 퍼지면서 이제 종교도 달라지고 있으니 더 큰 일이어요.”
“네, 역시 미트라교가 문제군요.”
왕비가 화제를 바꾸었다.
“아! 그리고 이번에 원로원에서 지난번 유대 주민 청원 사항 중 여행 자유화가 통과되었어요.”
“아, 잘되었네요!”
“앞으로 예루살렘 순례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날 텐데 안디옥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요단강을 우회하지 않고 사마리아를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바로 오게 될 거예요.
문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통행세를 달라고 하겠지요.”
“여행 기간을 단축하고 싶은 사람이 많을 텐데 서로 좋은 일이 아닐까요?”
왕비가 제비꽃 차를 천천히 한입 마시고 대답했다.
“사실은 우리 유대가 그렇게 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지요.
사마리아 난민이 순례객을 가장하고 내려오면 막을 방법이 없어요.
갈릴리 지역 신도시 완공 이후, 우리도 젊은이들 중 반은 실업자거든요.”
“네, 그런 문제가 있군요.
근본적인 해결책은 역시 다시 통일하는 방법밖에 없네요.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솔로몬왕의 영광을 다시 이룰 수 있겠지요.”
“음, 제가 공부한 역사책에는 어느 경우도 무력 충돌 없이 국경의 변경이나 나라의 통일이 이루어진 적이 없어요.
대화로는 안 돼요.
사실 로마도 오늘날의 제국을 건설키 위해 많은 내전을 겪은 후 막강한 군대로 로마의 뜻을 따르지 않은 나라는 즉시 침공해 다스렸지요.
정치는 근본적으로 대중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하는 활동입니다.
정치깡패들의 마지막 명분이 애국심인 것과 똑같지요.”
“현실적으로 그렇긴 하지만… 그러면 유대교의 많은 가르침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헤로디아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제 유대교도 좀 변할 때가 되었어요.
다윗이나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왕이 있었어요!”
프로클라의 눈이 다시 호기심으로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