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디아 왕비의 귀국행렬은 페르시아를 무찌른 로마 개선장군 못지않았다.
욥바항구까지 헤롯왕이 직접 영접을 나갔고 그녀의 기세는 왕비가 아니라 여왕과도 같았다.
당장 호시탐탐 국경을 넘어오려던 나바테아 왕국의 침략을 황제의 발표 한마디에 무력화시켰다.
또한 빌립 왕의 땅을 기본적으로 헤롯 왕의 영토에 귀속시킨다는 허락을 황제에게 받아내었으니 이보다 더 큰 성과는 어느 장군도 거둘 수 없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왕실 마차 안에서 헤롯이 말했다.
“왕비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진즉 알았지만 이번에 또 실감했어요.
정말 애 많이 쓰셨어요. 황제 폐하 건강은 좋으시지요?”
“제가 보기엔 앞으로 10년은 문제없으실 거예요.”
“그러셔야지요. 그분의 만수무강을 매일 기원하고 있다오.
가지고 간 물건은 잘 전달하셨지요?”
“그야 당연하지요.
좀 더 많이 가지고 갔어야 했는데 제 얼굴을 보고 모두 흔쾌히 받으셨지만 신경이 좀 쓰였어요.”
헤로디아가 황제를 만난 후 칼리굴라뿐만 아니라 게멜루스도 만나야 했고 그에게도 금을 나누어 주었다는 설명을 했다.
“오, 잘하셨소. 게멜루스 님은 만나보니까 어떻습디까?”
“나이는 아직 17살밖에 안되었지만 총명하고 겸손한 분이더군요.
황제 폐하를 쏙 빼닮은 모습인데 역시 친손자라 그렇겠지요.
그리고 이번에 보니까 제일 괘씸한 사람은 빌라도 총독이었어요.”
빌립 왕 영토 합병안을 빌라도의 반대의견만 없었어도 이번에 원로원까지 통과시킬 수 있었다며 왕비가 이를 갈았다.
“아니, 총독이 우리와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
“저도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확실한 사실 한가지는 빌라도는 우리의 적이고 앞으로 이 땅에서 하루속히 쫓아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면야 좋겠지만 로마 총독을 우리가 어떻게 쫓아내나요….”
헤롯의 목소리가 갑자기 맥이 좀 빠졌다.
“그 문제도 저한테 맡기세요.
빌라도를 몰아내고 우리의 영역도 넓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어요.
내일 프로클라 여사를 만나고 와서 진행 사항을 말씀드릴게요.”
“알겠소이다. 나야 왕비만 믿고 있을 테니 모든 일을 잘 처리해 주시오.”
헤로디아가 피곤한 듯 눈을 감고 마차 의자에 뒷머리를 기대었다.
네 마리의 하얀 말이 규칙적으로 끄는 박자에 맞추어 왕비의 늘어진 금귀걸이가 조금씩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헤롯도 졸음이 몰려와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난 후 헤로디아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안나스 제사장이 부탁한 대제사장 의복 ‘에봇’을 가지고 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너무 중요한 일이 많다 보니 전혀 생각을 못 한 것이다.
그렇다고 안나스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고, 지금이라도 로마에 사람을 보내서 가지고 오도록 해야겠다.
황제에게는 구두로 말씀을 드렸으니 맥슨 의원에게 부탁하면 잘 처리해 줄 것이다.
이번 여행에 맥슨 의원과 은밀히 하룻밤을 보낸 것은 여러모로 잘된 일이다.
앞으로 로마 원로원의 내부 움직임을 수시로 알려주기로 했고, 특히 영토 합병안을 다시 상정하여 빠른 시일 내에 통과되도록 앞장설 것이다.
에봇을 가지고 오는 것은 입이 무겁고 믿음직한 사람을 보내야 한다.
헤롯궁의 관리를 보내면 왕비가 깜빡 에봇을 까먹은 것을 아는 순간 소문을 낼 수도 있다.
그녀의 머리에 적당한 인물이 떠올랐다.
지난번 감옥에서 빼내 준 생색도 낼 겸 바라바를 만날 생각을 하니 저절로 흐믓한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쯤 왕비님이 유대 땅에 도착하셨을 것이다.
자신의 흉상도 예상보다 빨리 완성이 되어 역시 지금쯤 카프리섬에 도착했을 터인데 본인의 조각이라 그런지 루브리아가 볼 때는 어딘지 어색하고 맘에 들지 않았다.
칼리굴라 님은 파티 이후에 아무 연락이 없었다.
루브리아는 그를 만나는 일이 몹시 신경이 쓰이다가도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연민의 정이 느껴졌다.
어렸을 때 친했던 감정이 가슴 속 깊이 살아서 움직이는 성싶었다.
오늘 저녁은 맥슨 백부장과 만나기로 했다.
그동안 조각상을 만드는 핑계로 만남을 연기했는데 이제 더 이상 미루는 것도 실례가 될 듯했다.
카프리섬으로 가던 배 안에서 유타나의 권유로 단둘이 차를 잠깐 마신 후 처음이다.
“아가씨, 오늘은 우아한 베이지색 드레스가 어떠실까요?”
유타나가 가슴이 동그랗게 파인 드레스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응, 그래. 그게 좋겠네. 날씨가 무더우니까 목걸이는 하지 않을래.”
“아니에요. 이 옷에는 둥그런 금목걸이를 하셔야 해요.
그래야 아름다운 목이 더욱 돋보여요.
그동안 유대 땅에서 화장도 별로 안 하고 보석 치장도 안 하셨는데 여기는 로마예요.
아가씨의 신분을 잊으시면 안 돼요.”
유타나의 성화에 루브리아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심정 저도 이해해요.
며칠 전 예수 선생의 제자들을 잘 아는 제 친구에게서 서신이 왔는데 어떤 면에서는 신분에 얽매이지 않는 그들이 부러워요.
유대교 내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서 부자든 가난하든, 남자나 여자나, 노예든 자유인이든 모두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어요.”
“그렇구나. 그때 베다니 어느 집에 잠깐 있었지만 그들의 분위기가 참 화목했지.”
“네, 그리고 지금 그런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대요.
특히 부활하신 예수 선생이 곧 다시 예루살렘에 나타날 거라는 소문이 돌면서 외국에서도 유대인들이 모여들고 있나 봐요.”
“그 말을 들으니 나도 가보고 싶네.
그분이 예루살렘에만 오시고 로마에는 안 오시겠지?”
“아가씨가 한 번 초청해 보세요. 오실지도 모르지요. 호호.
그리고 그분의 여성 제자들이 모두 행실이 바르고 몸가짐이 단정하다는 소문이 나니까, 로마로 돌아오는 귀족들이 그들을 집안의 시녀나 심지어는 결혼까지 해서 데리고 오는 경우도 있다네요.
저도 베다니에 좀 더 있었으면 그런 남자 한 사람 만났을 텐데… 번개 가오리 못 먹은 이후에 제일 아쉬운 점이에요.”
“글세말이야. 미리 알았으면 나만 먼저 오고 유타나는 친구와 베다니에 남을걸.
여하튼 이제 로마에도 조금씩 예수 선생의 가르침이 전파되겠구나.
사실 신부감으로는 지금 로마의 귀족 여성들은 많이 타락했지.
맥슨 백부장이나 의원님도 그렇게 생각하실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