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초여름은 저녁에도 무더울 때가 많았다.
유대 지방에서 건조한 기후에 몇 년을 지낸 루브리아는 가슴에 땀방울이 흐르는 걸 느꼈다.
칼리굴라의 저택 앞에는 벌써 몇 대의 호화마차가 도착해 있었다.
오늘 파티는 루브리아 말고도 몇 사람을 더 초청한 모임인 듯싶었다.
지난번 왕비와 사무실에서 본 적이 있는 비서관이 그녀를 반갑게 안으로 안내했다.
칼리굴라 같은 사람이 로마 상류층 주거지인 팔라틴 지역에 살지 않고 로마광장 가까운 상업지역 근처에 산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했다.
아마 서민들과 같이 호흡하며 산다는 느낌을 시민들에게 주고 싶은지도 모른다.
거실로 들어가자 벌써 양 볼이 불그스레한 키 큰 청년이 오른손에 잔을 들고 반갑게 맞이하였다.
“오, 나의 루브리아!
비너스신께 맹세코 당신보다 검정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여인은 로마에 없을 거요.”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칼리굴라 님!”
말쑥하게 면도한 칼리굴라가 오늘따라 더 소년같이 느껴졌다.
그의 뒤로는 사령관 복장을 한 두 남자와 연두색 드레스를 멋지게 차려입은 여인이 루브리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인사하세요. 이분은 원로원 집정관을 지내시고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하실 갈바 장군입니다.”
약간 검은 얼굴에 다부진 체격의 40대 남자가 정중히 루브리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분은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입니다.
로마제국의 떠오르는 젊은 장군인데 곧 원로원 집정관으로 일하게 될 겁니다.”
키가 크고 근육질인 사내가 공손히 목례를 했는데 나이는 갈바 장군보다 몇 살 어려 보였다.
루브리아도 얌전하게 두 장군에게 뵙게 되어 반갑다는 말을 하고 연두색 옷을 입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저는 갈바 총독의 아내인 피디아라고 합니다.
칼리굴라 님이 그렇게 칭찬을 하셔서 속으로 질투를 좀 했는데 이렇게 뵈니 첫눈에도 루브리아 님은 미워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게 느껴져요.”
30대 초반의 통통하고 화려한 용모를 갖춘 귀부인이 처음 보는 루브리아를 껴안으며 말했다.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인사하는 루브리아의 귀에 마치 장난꾸러기가 키득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미워하다가 로마 경비대장인 로무스 장군에게 찍히면 안 되지요.”
칼리굴라의 한마디에 피디아가 너무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거렸다.
”로무스 대장님도 안녕하시지요?
유대 땅에서 고생하시다가 얼마 전 오셨는데 아직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근일 내에 찾아뵙겠다고 전해주세요.”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루브리아에게 정중하게 안부를 전했다.
루브리아가 감사하다고 말했고 얼굴이 검은 시녀가 다가와서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고 피디아에게 말했다.
상처한 지 얼마 안 되어 안주인이 없는 칼리굴라의 파티를 그녀가 나서서 주관을 하는 성싶었다.
루브리아는 곧 안쪽의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그의 집은 생각보다 크거나 화려하지 않았으나 몇 가지 최고급 술이 준비되어 나오기 시작했고 하프를 연주하는 음악가의 수준도 상당했다.
둥그런 식탁의 중앙에 칼리굴라가 앉았고 루브리아는 그의 오른쪽 옆에 자리했다.
시녀가 포도주를 한 잔씩 따르자 아스파라거스 위에 얹은 새우요리, 양파 소스에 버무린 관자 요리, 꿀에 저민 꿩 요리 등이 계속 나왔다.
“갈바 장군님께서 건배를 해주세요. 아니 오늘 음식은 피디아 님이 준비하셨으니 장군님이 사모님께 양보하시지요.”
피디아가 당연하다는 듯 오른손으로 포도주 잔을 들며 말했다.
“존경하는 칼리굴라 님, 이렇게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인과 맺은 오래전 인연이 앞으로 더 오래도록 두 분의 가슴에 간직되기를 기원합니다.”
칼리굴라가 만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포도주 잔을 들어 루브리아와 살짝 부딪쳤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수프와 샐러드가 계속 나왔다. 앤초비를 살짝 발효해 만든 소스는 신선한 채소와 잘 어울렸다.
“실례지만 루브리아 님, 목에 걸린 흑진주가 한 알 한 알이 참 크고 곱네요. 로마광장의 어느 보석상에서 구입하신 건가요?”
피디아가 부러운 눈빛을 하고 물었다.
“아, 네. 이건 제가 선물 받은 거예요. 유대의 헤로디아 왕비님이 주셨어요.”
“루브리아 님이 하니까 이쁜 거지 목이 굵은 사람은 안 어울려요.”
갈바가 자기 부인의 목을 쳐다보면서 슬쩍 말했다.
“아니, 이 양반이 지금 무슨 실례의 말씀을 하시나.
목이 학처럼 가는 사람에게.”
피디아의 대꾸에 칼리굴라가 키득거리며 웃다가 입을 열었다.
“그 암여우가 곧 유대 땅에 도착하겠구먼.
게멜루스를 몰래 만나고 떠난 지 한 열흘 되었으니까….
아, 나중에 두 분 장군님 마차에 10달란트씩 실으라고 했는데 그게 바로 그 암여우가 나한테 가져온 돈입니다.”
“감사합니다. 칼리굴라 님, 베푸시는 은덕을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정색하고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아, 내가 인사받으려고 그런 게 아니에요.
나중에 역모죄로 몰리면 그 돈은 헤로디아가 주었다고 하면 됩니다.”
갈바와 피디아가 따라 웃었다.
칼리굴라는 사람들이 헤롯왕을 사막의 여우라고 하는 것을 듣고 왕비를 암여우로 부르는 성싶었다.
칼리굴라가 반쯤 남은 잔을 한입에 비우더니 갈바에게 물었다.
“갈바 장군님은 로마 건국 이후 어느 장군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야 게르마니쿠스 장군님이지요.”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느냐는 듯한 대답이었다.
“칼리굴라 님 앞이라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피디아가 얼른 끼어들었다.
“이 이는 저에게도 늘 그렇게 말했어요.
게르마니쿠스 장군님께서 물론 게르만 지역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시어 오늘날 로마제국의 동쪽 국경을 확정하셨지만, 더욱 결정적으로 존경을 받는 것은 황제의 지위에 오를 수 있음에도 이를 사양하셨기 때문이지요.”
남편과 칼리굴라를 한 번씩 쳐다보고 그녀가 계속했다.
“로마제국 최대 최강의 게르만 사단이 쿠데타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이며 일제히 게르마니쿠스 장군님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으셨지요.
자신이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피를 물려받았는데도 말이지요.”
칼리굴라가 눈을 감고 입술을 앞으로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