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말 없이 조용히 앉아있던 루브리아가 입을 열었다.
“칼리굴라 님도 뛰어나신 웅변가라고 들었어요.
언제 한 번 대중들 앞에서 연설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제우스신의 그림자에게 맹세코 반드시 내가 로마의 군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루브리아에게 보여주겠소.
그들이 내 연설에 기뻐하고 환호하며 내 이름을 부를 것이오.”
“아, 네…. 옛날 눈 오는 게르만 전장에서 칼리굴라 님은 로마군의 마스코트로서 행운을 가져오는 상징이셨지요.
그때도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 게르마니쿠스 장군님과 같이 칼리굴라 님의 이름도 병사들이 같이 연호했던 기억이 납니다.”
칼리굴라가 사슴처럼 큰 눈을 거의 감으며 그때를 회상하는 듯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렇소…. 내 발보다 두 배는 큰 로마 군화를 신고 눈을 밟으며 아버지와 같이 게르만 군단을 사열할 때 들리는 함성이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하오.
그 당시 우리 나이가 6살도 안 되었을 텐데 루브리아도 아직 기억하고 있구려.”
“그럼요. 어떻게 그 광경과 함성을 잊을 수 있겠어요.”
칼리굴라가 손뼉을 가볍게 치니까 조금 전 들어 왔던 시녀가 재빨리 나타났다.
“향기 좋은 포도주와 안주 좀 가져오너라.”
그녀가 뒷걸음으로 얼른 물러갔다.
“오늘같이 기분 좋은 날 옛동무와 술 한잔하지 않으면 비너스 신께 맹세코 게르마니쿠스 장군의 아들이 아니겠지.
안 그렇습니까, 왕비님!”
“네, 그럼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왕비가 얼른 눈치를 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그때는 저를 잘 기억하실 겁니다.”
더 있으라는 만류의 말 한마디 없이 칼리굴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비를 배웅한 후 다시 자리에 앉은 그가 루브리아에게 나직이 말했다.
“저 여자는 아마 내 얼굴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 거요.”
루브리아가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는데 어린 시녀가 큰 은쟁반에 포도주 한 병을 가지고 와 칼리굴라와 루브리아의 자주색 크리스털 잔에 각각 따랐다.
곧 또 한 명이 훈제 연어와 알이 굵은 캐비아를 안줏감으로 따로 들고 두 사람의 앞에 놓았다.
“자, 우리의 20년 만의 만남을 위해 건배합시다.
꽃의 여신 플로라 님께 맹세코 앞으로 우리는 그동안 서로 못 본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자주 만나야 할 것이오.”
칼리굴라가 한 손으로 포도주 잔을 쑥 내밀어 루브리아가 들고 있는 잔에 부딪쳤다.
‘쨍’ 소리가 제법 크게 나자 그의 얼굴에 장난꾸러기 소년 같은 미소가 번졌다.
술 한잔을 입안에 몽땅 털어 넣은 칼리굴라가 눈을 반쯤 감으며 루브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옛날 루브리아는 나보다 키가 좀 컸었고 벌써 품위가 있는 소녀였지요.
그때 내가 속으로 결심한 생각이 뭔지 아시오?”
루브리아도 시원한 흰 포도주를 한 모금 삼키며 궁금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커서 이 소녀를 신부로 삼아야겠다’라는 생각이었소.
사실은 그 말을 그때 어머니께도 했었지요.”
“어머, 그러셨어요!”
루브리아는 조금 전 마신 포도주에 약간 취하는 느낌이었다.
순간 혹시라도 술에 무슨 약을 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럴 리는 없었다.
분명히 한 병에서 같이 나누어 따른 술이었다.
칼리굴라의 길고 허연 얼굴에 갑자기 우울한 기색이 역력했다.
“음… 그리고 불과 2~3년 후 이집트 여행을 다녀오신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지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후 10여 년간 복수를 다짐하시던 어머니도 국가 반역죄로 유배당한 섬에서 세상을 떠나셨고… 두 형도 그렇게 죽었고….
루브리아는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언뜻 대답을 못 하는 루브리아에게 그가 계속 말했다.
“아, 참! 인간은 어리석어요. 누구도 그날 아침에 일어나 다음날까지 산다는 보장이 없는데 내일을 생각하고, 몇 년 후를 생각하며 영원히 살 듯 살아가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그릇된 생각에 속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육체가 이 세상에서 갑자기 사라져 갔는지….
어떤 사람은 칼에 찔려 죽었고, 어떤 사람은 창에 맞아 죽었고, 어떤 사람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고, 어떤 사람은 감옥에 갇혀서 배가 고파 죽었고, 어떤 사람은 많이 먹다가 배가 터져 죽었고, 어떤 사람은 불에 타서 죽었고, 어떤 사람은 동맥을 끊고 죽었고, 어떤 사람은 애를 낳다 죽었고, 어떤 사람은 독사에 물려 죽었고,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어떤 사람은 자다가 죽었고, 어떤 사람은 독약을 먹고 죽었고, 어떤 사람은 엄마 뱃속에서 죽었소.”
칼리굴라가 일장 연설을 하듯이 단숨에 읊은 후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얼마 전 나의 아내도 23살에 애를 낳다 죽었고 뱃속에 있는 아이도 죽었으니까….”
“아, 죄송해요. 위로의 말씀도 못 드리고….”
루브리아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칼리굴라의 입술이 다시 비죽 나왔다 들어갔다.
“나는 나의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오.
만약 반역죄로 동맥을 끊으라는 명령이 없다면 어느 여인을 사랑하다 죽고 싶소.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멋진 마지막 밤을 보낸 후 새벽 동이 틀 무렵 이 포도주에 독을 타서 마시면 끝나는 것이오.
그 후에 태양이 다시 떠오르겠지만 내가 황제라 한들 나의 죽음을 사람들이 얼마나 슬퍼하며 며칠이나 기억하겠소.
이 반지 속에 있는 노란 독은 치명적이고 고통이 거의 없다고 하오.”
그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에는 엄지손톱만 한 누런 호박 반지가 끼어있었다.
포도주를 한 모금 더 마신 칼리굴라가 훈제 연어에 캐비아를 얹어서 루브리아에게 주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와서 자기들의 이야기, 유산상속 소송이 걸렸는데 도와달라, 반역죄로 감옥에 갈 것 같은데 막아달라, 원로원 의원으로 추천해 달라, 모두 부탁만 하러 온다오.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소.”
“저는 칼리굴라 님의 이야기를 들어드릴게요.
어릴 때 동무로서 무슨 말씀도 좋으니까 다 해주세요.”
얼마 후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젊은이가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려서 독살당했고 어머니와 두 형은 유배당해 모두 죽었으니 이런 정신적 트라우마를 그나마 지금까지 용케 견디고 있는 성싶었다.
이런 사람이 황제가 되면 모든 세상을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누어 자기 생각과 다르면 모두 비정상으로, 배신자로 몰아갈 것이다.
루브리아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젊은이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요. 고마워요. 나의 루브리아!
당신은 이제 내 곁에서 내가 어떻게 로마시민들을 행복하고 즐겁게 해주는지 지켜봐 주시오.
그들은 나에게 열광할 것이고, 그리하여 내가 어려울 때 근처에 얼씬도 안 한 배신자들을 나의 백성들이 심판할 것이오.
제우스신과 아폴로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오!”
칼리굴라가 다시 잔을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