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리아는 차츰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
걱정했던 카프리섬 방문도 제우스신의 도움인지 무사히 마쳤고 맥슨 의원님께도 어제 인사를 다녀왔다.
헤로디아 왕비는 모든 일이 생각대로 진전되는 듯 매우 기분이 좋으시고 특히 아그리파가 투옥된 소식에 자축하듯 포도주를 많이 마셨다.
이제 어릴 때 동무인 칼리굴라 님만 왕비님께 소개해 주면 모든 일이 끝난다.
루브리아는 바라바에게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바라바 님, 그동안 어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예정대로 카프리섬에서 황제 폐하를 알현한 후 로마로 돌아와서 주위 분들에게 인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배 여행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더군요.
저의 집에서 서쪽으로 가까이 보이는 아벤티누스 언덕에는 신록이 무성하고 5백 년 되었다는 큰 은행나무가 푸르른 잎사귀를 더하고 있습니다.
바라바 님이 이 글을 읽으시면서 제 눈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아셨을 거예요.
글도 작게 쓸 수 있고, 음악 악보도 선명히 보이니까 전혀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그날, 제 눈이 가시에 찔린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며칠 뒤 저의 집안 주치의 탈레스 선생이 그 가시에 피가 묻어 있었다고 했을 때 온몸에 전율이 일었어요.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달린 그분의 이마에 흘린 피였지요.
여호와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분의 은혜를 로마인인 제가 입은 거지요.
어쩌면 그 신은 유대인만의 신이 아닌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저를 치료하셨겠지요.
그래서 이제 고마운 여호와 신께 로마에서 바라바 님을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원하고 있어요.
바라바 님이 안토니아 요새를 나오시던 모습이 자꾸 눈에 어른거리고 제가 떠나야 했던 순간이 꿈속의 한 장면같이 느껴지네요.
그리고 앞으로 한 달간 '제2의 리시푸스'라는 로마 조각가가 우리 집에 와서 저의 흉상을 만들기로 했어요.
하나 더 만들어서 바라바 님께 보내드리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물론 나중에 바라바 님이 여기 오셔서 실물을 보시는 게 저도 훨씬 좋지만요….
이 서신은 제가 아는 주소, 바라바 님의 가게로 전달해 달라고 왕비님의 시녀장에게 부탁하겠어요.
그러면 받아보실 수 있겠지요.
그럼 오늘은 이만 줄이겠어요.
아름다웠던 일들만 기억하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로마에서 루브리아 드림>
서신을 다 쓴 루브리아는 빨간 촛농을 녹여 두루마리 서신을 봉했다.
좀 더 보고 싶은 심정과 애틋한 느낌을 쓰고 싶었으나 일단 연락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루브리아는 어려서부터 현숙한 여인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고 배웠고 헤로디아 왕비가 농이라도 맥슨 의원에게 추파를 던지는 듯한 언행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벌써 맥슨 의원과 두 사람이 은밀히 만났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들만을 탓할 수도 없다.
로마의 평화가 오래 계속되다 보니까 사람들의 관심이 모두 향락적으로 바뀌는 성싶었다.
황족이나 원로원 의원들 대부분이 밤새 술에 취해 파티를 하며 점심때가 지나야 일어나는 일은 이제 흉도 아니다.
혀를 자극하는 맛있는 음식을 모두 맛보려면 배가 너무 불러서 식사 도중에 토하는 방에 가서 잠깐 토하고 다시 먹기 시작하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
술과 음식 다음으로는 문란한 남녀관계가 따르게 되고 요즈음은 남편 있는 여성들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꼬리를 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렇게 사생활이 지저분해지니까 가정이 깨지고 부부가 서로 고소하는 사태가 매년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
루브리아는 베다니에서 만났던 나사렛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이 떠올랐다.
잠시 보았지만 대부분 여성스럽고 정숙한 느낌이었다.
활달한 여성도 있었고 서로를 자매님이라 부르며 한 가족처럼 화기애애했었다.
그 여성들이 지금 로마에 온다면 유대교의 전설에 나오는 소돔성이 바로 여기라고 할 것이다.
그나마 맥슨 백부장은 아직 젊어서 그런지 그런 분위기에 물들지 않은 듯했다.
대단히 총명하고 건강하며 누구보다 정의감이 강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로서 루브리아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연모의 정이 계속 느껴졌다.
조건으로만 본다면 아빠와 유타나의 말이 맞지만 루브리아는 가슴이 뛰지 않는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로마의 귀부인들이 대부분 성적으로 문란한 것도 사랑이 없는 결혼을 조건이 맞는다고 해 버린 부작용일 것이다.
루브리아는 마음이 안정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바라바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고 그의 목소리가 그리워졌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랑을 간직하며 그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행복감이 그녀의 가슴을 곱게 물들였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유타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가씨, 이제 슬슬 외출 준비하셔야지요.
오늘은 어떤 드레스를 입으실까요?”
“글쎄… 오랜만에 옛날 동무를 만나니까 연두색이 어떨까? 어린 잎새처럼….”
“네, 그것도 좋겠네요. 그럼 이 드레스에 에메랄드 귀걸이를 하시면 되겠어요.”
유타나가 옷장에서 연두색 옷을 꺼내면서 말했다.
“음, 그런데 너무 어려 보일 수도 있겠어.
점잖게 검은색 드레스는 어떨까?”
“검은색은….”
유타나가 조금 머뭇거렸다.
“오늘 왕비님이 검은색을 입으신다고 시녀장이 조금 전 알려왔어요.”
“아, 그랬구나. 그럼 그냥 연두색을 입는 게 낫겠네.”
“네, 그러세요. 왕비님이 무슨 옷을 입든 아가씨와는 비교가 안 되니까요.”
“왕비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실 거야.
맥슨 의원님도 30년 만에 보면서 왕비님이 더 아름다워졌다고 하셨어.”
“당연하지요. ‘30년 만에 보니 역시 세월은 어쩔 수 없군요’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그 말씀을 하실 때는 어느 정도 진실이 느껴졌어.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더 온화하고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
“네, 아가씨는 나중에 그렇게 되실 수 있어요.
그리고 맥슨 의원님 댁이 여기서 가까우니까 이제 산책 삼아 가끔 가보세요.
눈이 불편하실 때는 산책도 마음대로 못 하셨잖아요.”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 루브리아가 대답 대신 옆에 있는 서신을 주며 말했다.
“이따가 시녀장 만나면 이 서신을 건네줘.
내 부탁인데 유대로 돌아가자마자 여기 주소로 꼭 좀 보내 달라고….”
유타나가 주소를 보니 받는 사람이 바라바였다.
루브리아가 차고 있던 은팔찌를 빼 주면서 계속 말했다.
“이 은팔찌도 잘 닦아서 시녀장을 줘.
내 작은 성의라고 하면서…”
“이런 건 안 주셔도 되는데… 말 안 들으면 왕비님과 같은 검은색 드레스 입겠다고 하시면 되니까요.”
유타나의 기분이 별로 안 좋은 성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