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때를 밀지 않고 목욕을 끝내니 루브리아는 좀 어색했지만 편한 느낌도 들었다.
헤로디아 왕비가 그리스 프톨레미 왕조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이 조금 측은하게도 보였다.
하지만 왕비는 때를 미는 노예들의 심정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필로 선생이 쓴 글, 노예제도는 인간 본성에 맞지 않는다는 말에 코웃음을 치는 것이다.
사실 왕비가 노예들의 심정을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루브리아 본인도 그들의 어려운 삶을 전혀 실감 못 하고 겉으로만 동정심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유타나의 경우처럼 해방되었지만, 독립해 나가지 않고 예전과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해방 노예는 로마의 법에 따라 일정 기간이 지나고 큰 공을 세우면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고 고위공직자도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로마가 참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선실 문이 열리고 유타나가 탈레스 선생과 같이 들어왔다.
왕비에게 필로 선생의 말을 듣고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탈레스 선생을 불렀다.
“필로 선생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인들에게 오랫동안 지배받던 유대인의 후손이라 노예제도에 대한 획기적인 깨달음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너무 이상적인 생각이지요.
당장 로마의 경제도 노예들이 없으면 얼마 못 가서 무너지고 큰 혼란이 올 수 있으니까요.”
“네, 그렇지요. 하지만 그분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아요.
언젠가 노예제도가 없어지는 날이 로마에 올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적어도 우리 세대에는 어렵고 몇백 년이 지나도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먼 훗날 노예가 필요한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 간에 큰 싸움이 일어날지도 모르지요.”
“음, 필로 선생은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유대교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지요.
그가 쓴 책들을 로마 지식인들이 많이 읽고 있어요.”
“헤로디아 왕비님도 그의 책을 읽고 있으셨어요.
필로 선생은 신이나 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음, 그분은 일상적인 이분법적 사고를 초월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어떠한 절대적 존재나 궁극실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견해로 확실히 정의하는 순간, 엄격한 의미에서 궁극실재 즉 신과는 무관하게 된다는 거지요.
신은 우리의 말이나 생각을 초월하기 때문이지요.”
“필로 선생도 어렸을 때는 문자주의 유대교를 믿었지만, 시야가 넓어지면서 플라톤의 영향을 많이 받아 ‘로고스’에 대한 연구를 주로 했지요.”
“네, 저도 로고스에 대해 몇 번 듣기는 했는데 정확히 무슨 의미인가요?”
루브리아의 질문에 탈레스가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로고스는 대개 말씀 혹은 지혜, 진리 이런 뜻으로 해석이 되지요.
신학적으로는 지혜의 외적 나타남을 로고스라고 하고, 이 경우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상징됩니다.
지혜가 신성한 하나님의 위격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은 오래전 유대 선지자들의 글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격이 무슨 뜻인가요?”
“아, ‘위격’은 ‘히포스타시스’라는 그리스어에서 번역된 말인데 어떤 것의 본성이나 실체를 의미합니다.
이 경우 ‘하나님의 위격’이란 하나님과 별개로 하나님의 특성이나 속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혜가 하나님의 속성이고 그 위치가 하나님과 같다는 의미인가요?”
“네, 그렇게 생각해도 큰 무리는 없겠습니다.
여기서 지혜는 우리를 깨우치는 절대 존재이고 하나님이 처음 창조한 것이 바로 지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의 지혜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두 여인이 탈레스의 말에 계속 집중했다.
“그의 책 ‘농사’에서는 로고스를 ‘하나님의 맏아들’이라고 표현했고 심지어 ‘꿈’이라는 책에서는 하나님이 로고스에게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대목도 나옵니다.”
“그래서 같은 위격이라고 생각할 수 있군요. 역시 좀 어렵네요.”
“네, 그렇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이러한 생각이나 사상은 말이나 문자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지요.
필로 선생의 생각도 절대로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네, 그래도 그분이 로고스를 어떤 방향으로 정리하려는지는 조금 이해가 되네요. 말씀 감사합니다.
나중에 로마에서 그분을 한번 직접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네, 연세가 거의 60 정도 되었지만, 아직 건강하시니까 그럴 기회가 있을 겁니다.”
탈레스 선생이 말을 마치고 물 한잔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