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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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사도신경 20 화 ★ 21세기 기독교 광장

wy 0 2019.02.01

 

 문교수는 자신의 웹사이트 이름을 '21세기 기독교 광장' 이라고 정하고 이런 장소를 만들게 된 이유를 먼저 쓰기 시작했다.

 

책으로 말하면 일종의 서문이 될 터인데 전체의 내용을 개관하고 뜻을 밝히는 선언문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어스름한 새벽 에덴 동산을 나왔다. 

 

찬송가 ‘저 장미꽃 위에 이슬’을  흥얼거리며 좁은 길을 따라 걷는다.

 

때로는 길을 잃을 때도 있었고 자신의 몸을 숨기고 싶을 때도 있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심지어 믿는 척할 때도 많았다.

 

이 길을 계속 걸어가기 위해 귀에 은은히 들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했다.

 

도착한 곳은 '21세기 기독교 광장'이다.

 

이곳에 이미 와 계신 분들도 많지만 앞으로 더 많은 분들이 오실 것이다.  

 

솔직한 마음으로 무슨 질문이든 할 수 있는 광장,

 

열린 마음으로 무슨 대답이든 할 수 있는 광장,

 

그러나 말로는 말을 다 할 수 없음을 헤아리는 광장

 

이러한 '21세기 기독교 광장' 을 많은 분들과 함께 거닐고 싶다. " -

 

여기까지 쓰고 따끈한 블랙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문교수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문지방을 건넜다.

 

새로운 시대는 성서 연구와 신학의 탐구가 눈부시고, 교파적 해석보다는 폭넓은 에큐메니칼(교파통합) 운동으로 향하고 있다.

 

서구 세계가 주도하던 경제발전이 쇠퇴하면서 기독교의 교리가 예전의 호소력을 상실하고 있다.

 

문자주의를 고수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라는 선언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기가 어려워졌다.

 

천당과 지옥, 천사와 사탄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 장벽에 부딪쳤다.

 

특히 젊은 층들은 이러한 고대 세계관을 납득하기 어렵고, 이런 단어는 상징적 의미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신앙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도 정직하고 용기있는 대화가 오고 간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들의 교회가 소멸될 것 같은 절박한 위기감 때문이다.

 

한국의 기독교도 그러한 조짐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비종교인들 중 개신교에서 이탈한 사람이 불교나 천주교에서 이탈한 사람보다 월등하게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젊은 층과 고학력자들의 비율이 높다.

 

한국 교회는 21세기 들어서 양적으로는 물론 질적으로도 쇠퇴했는데, 그 이유는 주로 내부적인 몇 가지 문제 때문이다.

 

첫째로 한국 교회는 지난 수 십년간 개별 교회 성장에만 몰두하여 교회 건물은 커졌지만 사회적 지탄을 받는 일은 늘어났다.

 

엄청난 건물을 짓고서 바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모습들이다.

 

구원 받으려면 우리 교회가 바른 교회니까 다른 교회를 가면 안 된다고 할수록 심한 교회 자폐증을 앓고 있는 것이다.

 

한국 개신교가 재정 수입 중 평균 약 4% 만을 불우 이웃 돕기등 대외적인 사회 봉사활동에 사용하는 것도 공개하기 부끄러운 수치이다.

 

두 번째 문제는 오 백년 전 루터가 가톨릭의 면죄부를 반대하며 '오직 믿음으로' 라고 한 뜻을 과잉 해석하여 '묻지마 신앙'을 강요하는 것이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한 질문 자체를 무력화하고 심지어 불신앙적 태도로 간주한다.

 

검증된 과학적 사실보다 성경에 나와 있다는 이유로 하늘의 구조나 지구의 역사를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이 ‘오직 믿음’은 아니다.

 

이성과 상식을 기본으로 하지 않는 신앙은 이성과 상식을 초월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문제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기만 할 뿐 그 분의 삶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믿었으니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이고, 놀라운 세상의 복도 받았거나 받을 것이고, 죽으면 천당 간다는 '만사 신통' 신앙으로 뭉쳐있다.

 

한국 대형 교회의 삼위일체는 돈, 미국, 하나님이란 우스개 소리가 더 이상 우스개 소리가 아니다.

 

나만, 우리 가족만 잘되면 된다는 극단적 이기주의에 다름 아니다.

 

 2천년 전 유대 땅에서 예수님이 왜 복음서에 나오는 삶을 살았는지, 그 분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별로 관심이 없고, 생각하기도 싫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 잘못한 일이 있어도 곧 회개하면 된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인도네시아나 일본에 지진이나 해일이 나서 수만명이 죽는 것은 하나님이 노하신 것이다.

 

예수 믿기만 하면 천당 가니까, 굳이 그의 어려운 삶을 따를 필요도, 이유도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 간단히 집어 본 세가지 문제, 즉 교회 제일주의 신앙, 묻지마 신앙, 예수없는 신앙 중 가장 개혁이 필요한 것은 ‘묻지마 신앙’이다.

 

이것이 풀리면 다른 문제도 모두 해결되기 때문이다.

 

‘오병 이어’의 기적에 대해, 물 위를 걸은 것에 대해 2천년 전 유대인들이 왜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기록할 수 밖에 없었는지, 예수님께 무엇을 느꼈기에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는 지가  중요한 것이다.

 

신앙에 대한 단어는 상징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고 그 자체로 충분 한 것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고대 중세시대의 교리를 믿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정직한 일이다.

 

설령 잠시 믿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늘 애매하고 불안한 상태를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에게 무엇이 있었기에 하나님이 예수 안에 현존해 있다고 당시의 제자들이 믿게 되었을까?

 

바로 이것이 우리가 역사적으로 살펴볼 ‘메시아 예수’의 모습이다.

 

과연 무엇이 있었기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문익진이 '21C 기독교 광장' 의 서문을 이렇게 끝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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