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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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소리 3 : 생각해 보니 나는 몇 년 전부터 나를 저버린 세상을 미워하고 있었다.

wy 0 2020.02.03

바로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된장찌개 냄새였다

나는 방문을 활짝 열고 보글보글 끓고 있는 맛있는 소리에 빠져 먼 옛날로 날아갔다. 어쩌면 이렇게 옛날 된장찌개 냄새와 똑같을 수가 있을까. 나는 밖으로 나와 파란 하늘을 마시며 찬바람으로 얼굴을 씻었다. 내 모습을 본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부엌을 가리키며 더운 물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아니 좀 더 주무시지 뭐 하러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글쎄, 산신령이 내가 외롭다고 자네들을 보내 줬구먼.”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 나에게 햇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주었던 할머니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고 부엌문 바로 옆, 눕혀진 항아리 속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던 누렁이도 어린 날의 그 멍멍이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누렁이는 어린 날의 내 모습을 기억하는 듯, 항아리 속에서 달려 나와 반갑게 꼬리를 흔들었다. 나는 무슨 큰 횡재라도 한 것처럼 할머니와 누렁이를 번갈아 보면서 어린 날의 풍경을 맛보고 있었다.

 

할머니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고 길을 나서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주 찾아오겠다고 말하니 할머니도 꼭 그렇게 하라며 내 두 손을 꼭 잡고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정이 들다니 할머니가 마술을 부려 나를 어린 날의 그 시절로 데려다 놓은 것 같았다. 굴뚝 옆에 서있는 오동나무도 나를 바라보며 꼭 다시 오라며 커다란 잎사귀들을 흔들었다. 고운동으로 향하면서 나루가 말했다.

 

행님, 종주 마치면 중고라도 구해서 할머니네 텔레비전 바꿔 드립시다. 잘 나오는 걸로.”

하루아침에 병든 나의 햇살이 원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 그 뒤로 내 마음은 다시 평화가 움텄고 햇살 소리도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세상이 두렵지 않았다. 앞으로는 이 햇살이 병들지 않도록 잘 돌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햇살은 또다시 병이 들고 말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혹시 누군가가 나의 햇살을 오염시킨 것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누가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마음에 때가 찌들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는 마음에 때가 없어서 햇살이 병들 이유가 없었지만 이제는 내 마음이 햇살을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지저분해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햇살을 다치게 한 범인은 내 마음속을 헤집고 다니는 미움이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나는 몇 년 전부터 나를 저버린 세상을 미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났다. 햇살 없이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정말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문득 지리산 할머니가 떠올랐다. 하지만 자주 뵙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병든 나의 햇살을 살리려면 거기로 가야 했다.

마른 잎이 우수수 떨어지던 어느 가을날, 나는 무작정 진주로 향했다. 진주에서 버스 갈아타고 묵계 쪽으로 가다가 어느 마을에서 내렸다. 버스가 떠나는데 찻길에 누워있던 나뭇잎들이 벌떡 일어나 흩날리다가 다시 길바닥에 내려와 이리저리 뒹굴었다. 정류장 옆에 조그만 구멍가게가 보이기에 가게 노인한테 길을 물어 설레는 마음으로 산길로 접어들었다

 

이제 곧 만나게 될 할머니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빙긋이 웃었다. 요즘도 날마다 술을 마시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마을 어귀에서부터 올라가려니까 삼 년 전 능선에서 내려왔을 때와는 많이 낯설었다. 하지만 산마을은 어딜 가나 비슷비슷했다. 아마 산 냄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한테서도 산 냄새가 묻어났던 것 같다.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고개 중턱쯤 오르다 보니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나는 노인이 가르쳐준 데로 왼쪽으로 향했다. 비가 내렸었는지 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바퀴 자국들이 울퉁불퉁한 채로 굳어있었고 여기저기 웅덩이가 파여 있었다. 그래도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을 보니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 같았다. 할머니네 집 굴뚝에서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겠지. 할머니와 헤어지면서 앞으로 자주 찾아올 거라고 했는데 어느새 삼 년이 흘렀다. 그 세월에 할머니는 나를 잊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돌아가시지 않았는지, 아니면 치매에 걸리기라도 해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 아닌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게 무성했던 나뭇잎도 거의 다 떨어지고 능선은 숱 없는 노인의 머리처럼 휑하게 보였다. 날씨도 그렇고 뭔가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제 아침에 싱그러운 햇살들과 만날 생각을 하니 마음 한구석에서 즐거움이 꿈틀거렸다.

어느 정도 올라왔다고 생각할 무렵, 왼쪽 편으로 집 두 채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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