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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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소리 1 : 문창호지 사각사각 햇살 소리에 눈 비비고 일어나 파란 하늘 마셨지~

wy 0 2020.01.27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면 햇살 소리를 듣고 자란 어린 날의 고 몇 년이 나머지 날들을 다 합친 수십 년보다 훨씬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 햇살은 아침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고 그 덕분에 나는 오랫동안 평화로운 마음으로 살 수 있었다

이것은 요정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알게 된 동무, 햇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내가 햇살을 만난 것은 여섯 살이 채 안된 어릴 때였다.

하얀 들판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고 아무런 말도 없이 하얀 들판을 걸어갔다. 차가운 들바람에 뺨도 시리고 발도 시렸지만 나는 졸졸대며 아버지를 따라 걸었다. 저만치 초가집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하얀 들판을 걸어온 아버지는 어느 초가집 마당에 들어서자 신발에 달라붙은 눈을 쿵쿵 구르며 털어냈다

그러자 방문이 열리면서 할머니가 나왔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몇 마디를 나누고는 나를 남겨두고 갔다. 내가 둔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날 두고 떠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울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집과 할머니가 조금도 낯설지 않았고 오히려 아버지 고향에라도 온 것처럼 마음이 편했다.

 

아버지가 나를 데려간 곳은 소양강 다리 건너에 있는 샘밭이라는 곳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집을 떠나 그곳에 가야 했는지는 지금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첫 밤을 자고 난 아침, 누군가가 내 눈두덩을 살살 간질였다. 눈을 살짝 떠보니 아무도 없었다. 다시 눈을 감으니 또 간질였다. 그렇게 몇 번 되풀이하고 나서야 범인을 알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방에 햇살이 들어왔으니 누가 뭐래도 범인은 햇살이었다. 햇살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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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 밥을 짓다가 들어온 할머니가 잠에서 깨어난 나를 보고는 아침 해가 떴네, 라고 말했다. 나는 문창호지에서 무슨 소리가 난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말이 얼른 나오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날마다 아침이 되면 방문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방문을 가리키며 아침 해가 떴다는 말을 해 주었다. 드디어 열흘 쯤 지나서 나는 문창호지를 가리키며 할머니한테 말했다.

 

할머니 저기에서 소리가 나.”

그러자 할머니는 거친 손으로 내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어이구, 우리 강아지가 햇살 소리를 들었구먼.”

햇살은 그렇게 문창호지를 뚫고 들어와서는, 내 얼굴을 어루만지고 눈두덩을 살살 간질이다가 귓구멍까지 파고들어와 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런데 햇살은 어떻게 문창호지를 뚫고 들어왔는지 나는 그것이 정말 궁금했다.

 

할머니 쟤는 어떻게 이 방에 들어왔어?”

으응, 우리 강아지랑 동무하자고 들어온 거지.”

방 안에 햇살이 그윽하고 화로에 걸쳐진 삼발이 위에서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으면 내 마음에서 행복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된장찌개 끓는 소리가 하도 맛있게 들려서 귀를 가까이 기울여 보기도 하고 냄새를 맡고 침을 꼴깍 삼키기도 하였다. 할머니도 웃고, 나도 웃고, 된장찌개도 웃고, 햇살도 웃고 그야말로 나는 따뜻한 평화 속에서 살고 있었다.

 

세수하고 밥 먹자.”

하고 할머니가 말하면 나는 밖으로 나와 파란 하늘을 마신 다음 차가운 바람으로 얼굴을 씻었다. 그 모습은 본 할머니는 요놈!”하면서 내 손을 잡고 아궁이 옆으로 데려가 더운물로 얼굴을 씻겨주었다. 할머니하고 정이 들면서 나는 할머니네 집하고도 정이 들기 시작했다. 마당에는 눈을 뒤집어 쓴 장독들이 있었고 멍멍이도 야옹이도 있었다. 그리고 방에는 할아버지 사진이 걸려있었고 그 옆에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걸려 있었다. 할머니도 우리 아버지처럼 전쟁 통에 가족들과 헤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따뜻한 흙담에 기대앉아서 햇볕을 쬐었다. 그러면 멍멍이도 오고 야옹이도 왔다. 어떤 날에는 얼굴에 버짐 꽃이 많이 핀 여자 아이도 놀러왔다. 그 아이는 이웃집에 살았는데 가끔씩 초콜릿을 가져와서는 자기 언니가 미군부대에 다닌다고 자랑을 하곤 했다. 그리고 또 어떤 날에는 얼음판에 나가 팽이를 치거나 아궁이 앞에서 할머니가 구워주는 고구마를 먹기도 하였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일곱 살이 되던 어느 날, 나의 평화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를 데려가기 위해서 아버지가 온 것이다. 나는 가기 싫다고 떼를 썼지만 오히려 할머니는 학교에 다녀야 한다면서 나를 달랬다. 멍멍이, 야옹이, 버짐 꽃 핀 아이, 모두 다 내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할머니도 아쉬운지 자꾸만 내 머리를 어루만졌다.

 

할머니와 내 동무들 그리고 정든 초가집과 나는 그렇게 헤어졌다. 사랑은 맞울림이 있어야 사랑이다. 그래야만 오래도록 따뜻하다. 햇살, 할머니, 된장찌개, 화로, 그리고 나중에 알은 거지만 울타리나무는 싸리나무였고 사립문 옆에서 집을 지키고 있던 나무는 찔레나무였다. 마당에 있던 꽃들은 채송화, 맨드라미, 백일홍. 해바라기, 달리아, 붓꽃······. 나는 그들에게서 맞울림을 느꼈고 그 덕에 오래도록 평화로운 마음을 지닐 수 있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나는 알았다. 그 때 할머니가 나에게 아주 고귀한 선물을 주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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