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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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사도신경 31 화 ★ 변심한 황제

wy 0 2019.03.13

 

마침내 AD325년 5월 20일, 역사적 회의가 시작되어 황제의 종교 고문인 호시우스가 사회를 보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직접 회의에 참석하였다. 

 

나이가 70이 넘은 아리우스는 감독이 아니라 회의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나 회의 참석자들의 반 이상은 아리우스를 지지하였다. 

 

아리우스파의 입장을 묵묵히 듣고 있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더 듣기 전에 내 생각을 말하겠소. 

 

다 좋은데 한 가지만 수정합시다. 

 

나는 예수와 하나님은 ‘동일 본질’이라고 생각하오.”

 

황제가 이미 논쟁의 핵심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려고 회의에 직접 참석한 것을 느낀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결국 동일 본질이라는 희랍어 ‘Homoousios’ (Homo-동일, Ousios-본질) 라는 말을 채택하게 되었고 예수님은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참 하나님이다’ 라는 표현을 확정했다. 

 

회의에 참석한 젊은 아타나시우스의 신념에 찬 연설도 ‘동일 본질’을 선택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이것으로 회의는 끝났고 이 신조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죄하고 파문하고 유배 보낸다는 말도 회의록에 덧붙였다. 

 

아리우스는 서명을 거부하여 알바니아 지방으로 유배 당했고 끝까지 그를 지지했던 리비아의 두 감독은 처형 당했다. 

 

니케아 신조는 325년 6월19일 호시우스가 반포했으며 이렇게 니케아 공의회는 막이 내렸고 아리우스의 저서들은 모두 불태워졌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은 아리우스 논쟁을 끝내지 못하였다.

 

황제 앞에서는 숨을 죽이고 있던 감독들이 각자의 교회로 돌아와서는 아리우스 주의를 계속 견지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아리우스 지지는 하지 않았지만 대부분 징계 받지 않을 정도로 아리우스 쪽에 가까운 노선을 유지하는 가운데 아타나시우스는 더욱 고립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 전개 되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마음을 바꾸어 다수의 편을 들게 된다. 

 

예상과 달리 니케아 회의 이후에도 교회가 분열 되고 니케아 신조가 오히려 더 큰 논쟁을 일으키자 황제는 아리우스를 유배지에서 부르고 그에게 변론의 기회를 준다. 

 

아리우스를 만난 황제는 그의 열성 지지자가 되어서 이번에는 아타나시우스를 감독직에서 파면하고 유배를 보낸다.

 

이렇게 아리우스파가 강성해지자 자체적으로 내부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박해에도 아타나시우스는 불굴의 정신으로 계속 투쟁했고 전부터 그를 지지하던 서방 교회들은 한마음으로 뭉쳤다.

 

20대 중반에 논쟁의 중심에 뛰어들어 오랜 세월 유배를 당하면서도 50여년을 투쟁한 아타나시우스, 그는 박해를 당하며 세상을 떠났지만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분열되지 않았다.

 

반면에 아리우스파는 미묘한 교리상 차이로 3~4개로 분열되어 혼란을 거듭하는 가운데 제국에 큰 변화가 생겼다.  

 

새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한 것이다.

 

당황한 아리우스파는 황제에게 반발했으나 이미 구심점을 잃은 터라 별 힘을 쓸 수 없었다. 

 

 새 황제는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제2차 공의회를 소집했다.

 

약 2백명의 감독이 모인 가운데 아타나시우스의 삼위 일체 교리가 다시 정통으로 확정된 것이다. 

 

여기까지의 역사를  짧게 서술한 문교수는 1700년전의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심정과 신념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두 사람 모두 당시로서는 자신들의 믿음이 절대로 옳다고 믿었다.

 

아리우스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되면 기독교가 다신교가 된다고 생각했고,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다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목숨을 건 하나님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리고 삼위일체에 관해 말하자면 1700년이 지난 지금도 사실 설명하기가 어렵다.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지만, 위격(person)에 있어서는 셋이다’ 라는 추상적 선언에 대해 질문하기도 어렵고 대답하기도 쉽지 않다. 

 

삼위일체가 정통교리가 된 이후 그런가 보다 하면서 넘어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신학자들이 설명의 방법으로 삼각뿔이라는 입체 모형을 제시하였다. 

 

삼각뿔 맨 위의 정점을 하나님이라고 설명하고 아래의 세 꼭지점을 이어 내려가는 세 선을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했다. 

 

삼위일체1.jpg

 

어떤 입체 안에 하나와 셋이 함께 연결되어 공존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니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 다른 설명으로 음악적 화음을 고안 해 냈다.

 

‘한 화음 안에서 ‘도 미 솔’을 동시에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삼위 일체는 그런 것이다’ 라고 했다.  

 

독일의 바하가 평생을 교회 음악을 작곡하면서 삼위일체론을 음악의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이 있다. 

 

요컨대 이러한 삼각뿔이나 화음이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일 수 있는 것처럼 삼위일체도 그 안에 조화의 관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어느 신학자는 삼위일체 안에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세상의 조화가 들어있다는 멋진 설명도 했다.

 

이렇게 문교수는 니케아 공의회와 그 이후 60년의 역사를 나름대로 정리하여 21C 기독교 광장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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