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기독교 광장’의 서문에 이어서 문익진 교수는 기독교의 주요 신학적 개념과 단어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하기로 했다.
사람들은 '3위1체'나 '사도신경' 같은 종교적 교리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 시대의 문화적 배경과 역사적 사건이 씨줄과 날줄로 치열하게 엮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먼저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로 크게 나누어지는 근대 신학적 갈래에 대한 발자취를 객관적으로 써나가기 시작했다.
“기독교가 AD313년 로마제국의 합법적인 종교가 되고,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주도로 하느님과 예수님이 동격으로 선포된 후, 381년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이후 두 번의 큰 역사적 변화는 1054년 기독교가 가톨릭과 동방 정교로 분리된 사건과 1517년 루터가 가톨릭에서 개신교 혁명을 일으킨 사건이다.
현재 기독교는 이 세 개의 종교로 크게 나뉘어 있다.
이후 개신교는 칼빈이나 웨슬리같은 분들이 장로교, 감리교등을 설립하면서 여러 교파로 나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교파 분열보다 천문학, 생물학등 과학의 발전이 기독교의 위기를 더욱 가중시켰다.
17세기 갈리레오의 천문학적 발견은 1세기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진리라고 생각한 우주관을 허물어뜨렸다.
성경이 쓰여질 시대에는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3층 구조라고 믿었고,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이나 에녹, 엘리야가 승천한 것처럼 하늘로 높이 높이 솟아오르면 되었다.
또한 여호수아가 넉넉한 햇볕으로 암몬족을 살육 할 수 있도록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을 정지시킨 여호와의 전능하심을 믿고 찬양했다.
하지만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갈릴레오의 비성서적 주장에 대해 화형으로 위협하던 가톨릭 교회는 지난 1991년 12월 갈릴레오가 옳았고 그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것이 잘못 되었음을 시인했다.
고대의 우주관이 무너지면서 하늘에 계시던 하나님의 거처가 공개적으로 애매하게 되었다.
또 다른 큰 충격은 18세기 초 생물학에서 왔는데 인간의 수태 과정에서 여성의 난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확인 된 것이다.
중세 시대까지 인간의 새 생명은 오직 남자의 씨 속에 있고 여성의 공헌은 9개월간의 보호와 성장을 위한 자궁의 역할 뿐이라 생각했었다.
마치 농부가 땅속에 씨를 심으면 어머니 대지가 그 씨를 기르는 작용과 같다고 믿은 것이다.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생각이었고 동정녀 잉태에 대한 믿음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원죄가 있다는 교리에서 남성의 죄 있는 씨 대신 성령의 씨로 잉태한 분은 아무 죄가 없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의 난자가 정확히 새 생명의 반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가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아담 이후 처음으로 아무 죄 없는 인간이라는 선언을 1854년에 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도 반은 죄인의 몸을 받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리를 보호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러한 충격과 변화는 다윈의 진화론에 비하면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다윈 이전에는 인간의 위상이 천사보다 약간 못했는데, 알고 보니 인간은 원숭이보다 두뇌가 조금 더 큰 동물이라는 불유쾌한 생물학적 이론이 성립 된 것이다.”
여기까지 과학의 발전이 기독교에 미친 충격과 변화에 대해 간략히 쓴 문교수는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크게 한번 펴고, 목을 몇 번 좌우로 돌린 후 다시 자리에 앉아 계속 써내려 갔다.
“이러한 과학적 발전이 인간의 사고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고 기독교 세계에도 어쩔 수 없는 변화를 가져 왔는데 바로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이었다.
과학이 자유주의 신학의 디딤돌이었다면 데카르트 이후의 서양 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기반을 다지는 영양분을 공급했다.
스피노자, 칸트, 헤겔 등으로 대표되는 철학자겸 신학자들의 사상과 삶의 자취가 한 시대를 풍미한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독일의 ‘슐라이엘마허’가 1799년 ‘종교론’을 출판하면서 시작되어 1930년대까지 유럽과 미국의 신학계를 이끌었다.
1906년 독일의 슈바이처 박사도‘역사적 예수의 탐구’ 라는 책을 써서 이 대열에 적극 합류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문자 그대로 어떤 교리를 절대시하지 않으며 개방된 마음, 다른 주장에 대한 관용, 진리에 대해 겸허한 태도를 중요시했다.
이것은 결국 19세기의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시대 정신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하고 변호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 중심의 신학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고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여기에 반대하는 신학들이 나타났다.
유럽에서는 신정통주의 신학, 미국에서는 근본주의 신학이 새로운 신학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발전에 대한 낙관적 자신감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1차 세계 대전과 1929년 경제 대공황을 겪으면서 인간의 합리적 행동과 역사의 진보주의에 대한 신뢰가 크게 무너지면서 자유주의 신학도 같이 쇠퇴하였다."
여기까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이제 미국에서 20세기초에 일어난 근본주의 신학에 대해 쓰기 시작하려는데 컴퓨터에서 새로운 이메일이 왔다는 신호가 울렸다.
보낸 사람은 문교수의 은사인 켐브리지 대학의 폴 로빈슨 교수였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메일을 열어 보았다.
“친애하는 문교수에게
우리가 만난지도 벌써 1년이 넘은 것 같소.
나는 이제 성당 발굴 작업이 거의 끝이 나서…. “ -
그의 이메일에 니케아 호수 아래 성당에서 발굴한 유적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로빈슨 박사는 올 11월에 89세가 되는데 젊어서는 아프리카에서 5년간 슈바이처박사를 도왔다.
이후 이집트의 나그함마디 문서에 대한 독보적인 해석과 로마시대 기독교 유적 발굴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문익진을 10년간 가르치고 같은 대학의 교수로까지 이끌어 주었다.
문익진이 영국에 남아 신학 연구를 계속하기를 바랬지만 귀국을 결심하자 매우 섭섭해 하면서도 언제든지 학교로 돌아오면 자신의 자리인 종교철학 종신 교수직을 물려 주겠다고 했다.
버틀란트 러셀이나 비트겐슈타인같은 세계적 철학자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교정에서 종신 교수로 재직하는 것은 큰 영광이었으나 문익진은 고국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선택을 했다.
로빈슨 박사가 보낸 성당 벽의 사진은 잠수사가 물속에서 촬영하여 선명치는 못했으나 이집트 고대 문자인 콥트어로 쓰여있는 사도신경에 대한 기록이였다.
콥트어는 고대 이집트에서 쓰던 고문자인데 만약 발굴한 사도신경의 내용이 우리가 지금 외우는 사도신경과 다르다면 이것은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로빈슨 선생이 보낸 자료는 언뜻 보기에도 그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문익진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