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희를 만나기 위해 서준은 그녀의 아파트를 다시 찾았다.
처벌 불원서를 고소인의 착오 때문이라고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꼼짝없이 무고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설득이 쉽지 않을 것이다.
선희에게 전화를 걸어 지난 번 김밥 집에서 만나자고 했더니 그녀가 서준을 집으로 초대했다.
자신이 스파게티를 잘 하니 집에서 대접을 하고 싶다며 일요일 저녁 7시로 약속을 했다.
처음에는 젊은 여자 혼자 있는 집에 가는 것이 망설여졌고 혹시나 또 무슨 계략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그녀의 호의를 거절할 상황은 아니었다.
아파트 근처 ‘파리 베이커리’에서 치즈케잌 한 판을 사서 손에 들고, 선희가 사는 동으로 걸어 들어 가는 길목에는 어느새 낙엽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준의 머리 속에서, 식사를 끝내고 그녀가 와인을 권할 때 현관 문이 갑자기 열리고 손준기가 카메라를 들이대는 장면이 섬광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럴 리가 없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안에서 누군가 서준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고 선희가 사는 15동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12층을 엄지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잠시 후 선희의 방문 앞에서 벨을 한 번 울리자 '잠깐만 기다리세요' 라는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열리고 핑크색 꽃무늬 원피스에 연두색 앞치마를 걸친 선희가 밝게 미소지었다.
서준이 현관에 준비 돼 있는 파란색 남자 슬리퍼를 신었다.
거실은 검정색 가구로 심플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고 은은한 제비꽃 향기가 서준의 코를 기분 좋게 자극했다.
"7시 정각에 오셨네요. 지금 막 국수를 넣으려고 물을 끓이고 있었어요."
퇴근하고 돌아오는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 같은 목소리였다.
"우선 소파에 앉으셔서 와인 한 잔 하세요."
그녀가 냉장고에서 화이트 와인 한 병을 꺼내어 코르크를 능숙하게 돌려 뽑은 다음 서준의 잔에 반쯤 따랐다.
와인의 서늘한 기운이 크리스탈 잔을 통해 서준의 손에 전달되었다.
"와인을 사왔어야 했는데 케이크 밖에 못 가져왔네."
서준이 내민 케이크 박스를 받으면서 선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머, 제가 뉴욕 치즈케잌을 제일 좋아하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아, 그리고 이 작은 단풍잎도 끼어 놓으셨네요. 너무 낭만적이세요."
박스 위에 묶인 리본 사이에 작고 빨간 단풍잎이 일부러 넣은 것처럼 끼어 있었다.
"아, 그건 여기 걸어 오면서 단풍이 떨어져서..."
서준이 자기도 몰랐다는 말을 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기사를 쓰고 있는 건 아니니까 굳이 사실을 밝힐 필요는 없었다.
"와인 드시면서 잠깐만 계세요. 제가 금방 스파게티 만들어 올게요."
맑고 연한 노란색의 화이트 와인은 달콤하면서도 산뜻한 느낌이 생각보다 훌륭했다.
오른쪽 벽에는 선희 엄마인 듯한 여성의 사진 액자가 여러 장 걸려 있었다.
살며시 일어나서 사진 쪽으로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국제 영화제 시상식 행사에서 트로피를 받고 활짝 웃는 모습들이었다.
10여년 전 사진인데 누가 봐도 선희의 언니라면 틀림 없을 젊은 미모를 발산하고 있었다.
마늘 쪽 같은 코의 선과 볼에 생기는 보조개가 그대로 10년 후 선희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한때 은막을 누비던 여배우가 60도 안되어 택시에 치어 숨졌다는 사실이 서준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소파로 돌아와 와인을 한모금 더 마셨을때 선희가 부엌에서 접시를 들고 나왔다.
"이건 양송이 수프이에요. 식탁으로 오셔서 이것 먼저 드세요."
네모난 하얀 식탁 위에 은색 포크와 스푼이 차려져 있었고, 안개꽃 사이로 보라색 꽃들이 꽂혀있는 작은 꽃병이 중간에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와인 잔을 살짝 부딪친 후 서준이 수프를 한 수저 입에 넣었다.
"와 고소하고 정말 맛있네요. 고급 호텔 양식당 솜씨야."
"제가 양송이 수프와 스파게티는 엄마에게 잘 배웠는데 사실은 둘 다 쉬워요.ㅎㅎ"
그녀의 눈가에서 순간 촉촉한 물기가 살짝 비쳤다.
"어머니 사진을 봤는데 정말 미인이셨네. 선희씨가 그대로 빼 닮았어요."
"제가 좀 닮긴 했는데 엄마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어요.ㅎㅎ"
대화를 하면서 먹었는데도 양송이 수프가 금방 바닥이 보였다.
"오늘 스파게티는 무슨 스파게티게요?"
그녀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배었다.
"음, 아까 냄새로 봐서는 토마토 스파게티 같던데..."
"반은 맞추셨어요. 토마토와 조개 스파게티에요.
보통 봉골레 스파게티는 하얀 소스로 하는데 저는 창의력을 발휘해서 토마토 소스로 해요.
음식을 맛있게 먹는 비결 중 하나는 음식의 정체를 잘 모르는 거에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미국 TV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우주 비행사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가 있는데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은 내용물이 안 보이는 통조림에 '맛있는 디저트' 라고 겉에 간단한 설명만 붙인 것이었어요.
예측 할 수 없어서 열 때마다 기대하니까요.
제 요리도 그런 원리지요. 창조 경제가 아니라 창조 요리에요.ㅎㅎ”
“그 말을 들으니 토마토 봉골레 스파게티가 더 궁금해지네...ㅎㅎ"
"네,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곧 가지고 나올게요."
그녀가 수프 그릇 두 개를 반짝 들고 일어나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선희가 움직이자 다시 제비꽃 향내가 풍겼다.
서준은 그녀의 환대에 약간 어색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어려운 일을 부탁하러 온 사람은 자신이고, 라면에 계란 하나 넣어 끓여 줘도 고마울 판인데, 역시 무슨 음모가 있는 성 싶었다.
와인에 무슨 독이나 수면제를 탄 것 같지는 않아서 한 모금 더 마셔 보았다.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 입맛에 딱 맞았다.
한잔을 비우고 다시 반쯤 더 따랐다.
선희가 큰 쟁반에 스파게티 두 그릇을 가지고 나왔다.
잘 익은 싱싱한 조개 냄새와 토마토 소스의 상큼한 조화가 잘 어울렸다.
서준이 선희의 와인 잔에도 화이트 와인을 반쯤 따라 주었다.
"봉골레 스파게티는 조개의 신선도가 생명이에요.
국수도 끓는 물에 넣는 시간과 온도를 잘 지켜야 하고요.
어서 드셔보세요."
서준이 입맛을 다신 후 포크로 국수를 찍어 돌돌 말은 후 스푼과 같이 들어서 입안에 넣었다.
얼마 전 본 TV 먹방 프로에서 그렇게 먹어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국수가 알맞게 익었고 조개의 신선한 맛과 향긋한 소스 맛이 흠 잡을 데 없었다.
너무 맛있다는 말을 막 하려는데 '딩동' 하고 벨소리가 들렸다.
서준의 심장이 뛰었고 선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