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제 호텔 커피숍은 진달래색 카펫 위에 고급스런 누런 가죽 소파가 듬성듬성 놓여 있고, 신맛이 도는 킬리만자로 커피 냄새가 서준을 맞이하고 있었다.
손님들이 몇 테이블 있는데 혼자 앉아있는 여자는 없었다.
서준은 구석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선희가 나오면 어떻게 설득해야 할 지를 생각했다.
천정에 달린 동그란 스피커에서는 남진의 ‘빈잔’이 나오기 시작했다.
“실례지만 최서준 선생님이십니까?”
갑작스레 옆에서 들리는 굵은 남자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키가 큰 젊은이가 혼자 서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저는 선희의 친척 오빠입니다. 선희 대신 나왔습니다.”
볼펜 스타일 녹음기를 가지고 나왔어야 했다는 후회가 번쩍 들었다.
당황스럽고 불쾌한 심정을 애써 감추며 서준은 앞 좌석에 털썩 앉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나이는 많아야 20대 중반 같았고 미끈한 얼굴이 꽃뱀 뒤에 있는 제비였다.
“선희씨와 친척이라면 얼마 전 돌아가신 분과 어떤 관계이신지?..”
“김혜순씨가 저의 이모님이십니다.”
서준도 모르는 선희 엄마의 이름을 대며 대답했다.
“최선생님은 신목사의 친구분이라고 들었는데 실례지만 무슨 일을 하시나요?”
상대방이 반격하듯 질문했다.
신분을 밝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사실대로 말한 후 약간 긴장하는 상대방에게 계속 물었다.
“오늘 아침 신목사 아버님께 전화 한 사람이 본인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말투가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명함 있으면 하나 주세요.”
서준이 사무적으로 말했다.
“명함은 없고 제 이름은 손준기라고 합니다”
본명이 아닌 성 싶었고 이 바닥의 제비치고는 외우기 쉬운 이름이었다.
“손준기씨는 무슨 일을 합니까?”
“헬스 클럽 개인 트레이너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봐요. 손준기씨, 무고죄도 큰 죄인데 거기다가 공갈로 금품을 갈취하려 했으니 죄질이 상당히 안 좋아요.
지금이라도 고소를 취하하면 나도 맞고소를 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엄중한 형사처벌을 받게 될거요.”
서준의 목소리가 높아졌는지 옆 테이블에 앉은 남녀가 힐끔 쳐다 보았다.
“손님,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종업원이 누런 가죽판 메뉴를 두 사람 앞에 살며시 놓았다.
서준은 불루마운튼을 시켰다. 7천원이니 호텔치고는 가격이 괜찮았다.
손준기가 자신은 안 마시겠다고 한 후 서준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무고죄라고 하셨는데 그건 판사가 결정하는 것이고, 우리는 젊은 목사님의 앞날을 생각해서 합의를 할까 했었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니 억수로 섭섭하네예.”
여종업원이 무슨 말인가 더 하려다가 메뉴를 손에 들고 돌아섰다.
“성경책을 보면 곧 세상이 끝난다는 데 맞긴 맞네.
젊은 목사님이 여학생을 성추행하는 세상이니까,
그라믄 최기자님 생각대로 맞고소를 하시던 맞키스를 하시던 맘대로 하시소.
지는 이만 가보겠습니더.”
손준기가 벌떡 일어나 말릴 새도 없이 뚜벅뚜벅 나가버렸고 체면상 일어나 붙잡을 수도 없었다.
처음부터 너무 강하게 몰아 붙였나 하는 후회도 들었지만 어차피 깨질 대화였다.
선희를 직접 만나서 설득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휴대폰을 꺼내 연결을 해 보았다.
지금은 통화를 할 수 없으니 삐소리가 나면 메시지를 남기라는 신호에 서준은 망설이다 그냥 끊었다.
전화보다는 선희의 집으로 바로 찾아가는 것이 좋을 성 싶었다.
시간은 저녁 6시가 조금 못 되었고 교회에서 장로님께 받아 적은 그녀의 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마포의 아파트니까 택시를 타면 30분 안에 도착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문하신 불루마운튼 나왔습니다.”
얼굴에 여드름이 난 여종업원이 무릎을 옆으로 살짝 구부리며 하얀 커피잔을 놓았다.
모락모락 커피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서준을 놀리는 것 같았다.
마포로 가는 택시 안에서 서준은 이번 일을 하나님의 징계라고 했던 신장로님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방주가 한 일이 징계 받아야 할 일이라면 손준기 같은 사람은 어찌 돼야 하는가.
그러니까 사람들이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믿는구나 싶었다.
이번 일은 서준 혼자 서둘러서 될 일은 아니고, 방주가 적어도 몇 달 간 감옥에서 고생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준기가 말했듯이 젊은 목사로서 방주의 앞 날은 무죄가 나지 않는 한 다른 직업을 찾는 편이 나을 것이고 설령 무죄가 되어도 큰 상처로 남을 수 있다.
택시가 마포의 캐슬 아파트 입구로 들어섰고 선희의 아파트가 있는 15동 앞에서 멈추었다.
누런 금빛으로 외관을 치장한 특이한 건물이었다.
관리 사무소 안으로 들어가서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약속을 안 지킨 쪽은 그녀니까 바로 15동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을 눌렀다.
지은 지 3-4년 밖에 안된 새 아파트 같았고 엘리베이터는 빨랐다.
쪽지에 적힌 1203호를 확인하고 서준이 문앞에 달린 까맣고 둥근벨을 한 번 눌렀다.
'딩동' 하는 소리가 안에서 조그맣게 들렸다.
잠시 기다려도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이번에는 두번을 연속으로 눌렀다.
역시 어떠한 소리도 작은 벨소리 후에는 들리지 않았다.
서준은 잠시 후 아파트 입구를 나와 관리인 사무실로 들어갔다.
찌든 담배 냄새가 상자갑 같은 공간에 배어있었다.
“1203호에 사는 오선희씨를 찾아 왔는데 지금 집에 아무도 없나 보네요?”
60은 넘어 보이는 깐깐하게 생긴 관리인이 안경 너머로 서준을 훑어보았다.
“꼭 만나야 되는데 그럼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러시구려. 늦게 다니는 학생은 아니니까 9시 전에는 올 거요..”
서준이 인사를 하고 나가는데 관리인의 말이 이어졌다.
“아, 지금 저기 오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