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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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사도신경 69 화 ★ 유대 역사 속에 산다

wy 0 2019.07.27

 

 

방주가 시계를 보니 12시가 지나고 있었다.

 

올해도 12시간 밖에 안 남았다.

 

단상 위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문교수가 계속 말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 이룬 공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백여 년 전 선교사들의 희생적인 봉사와 예수님을 본 받는 삶을 사신 신앙의 선배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날 제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도 그 분들의 가르침과 은혜입니다

 

21C에 접어들면서 우리가 지난 세기에 배웠던 사회 문화적인 패러다임에 변화가 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동네마다 수 많은 교회들이 들어서 있고 한 주일에도 몇 번씩 교인들이 모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가르치고 유대사회에 뿌리를 두었던 기독교의 역사와 교리를 반복하여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그물을 던지라 하실 때는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가 시작된 때입니다.

 

또 모세가 홍해를 가르던 때나 다윗과 솔로몬 시대는 한국은 더욱 까마득한 옛날입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행적은 사실로 믿으면서 신라 박혁거세의 일화는 당연히 신화로 치부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옛 이스라엘의 예언자나 왕들의 이름은 잘 외우면서 한일합방, 해방, 심지어 6 .25가 언제 일어났는지 잘 모르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

 

방주도 한일합방이 언제 일어났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문교수의 말이 계속 되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육체적으로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고대 유대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한국 교회의 끊임없는 유대 역사 교육이 이 시대에 과연 긍정적인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할 때입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유대 시대의 역사 속에 살게 되면 지금 이 땅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어렵습니다.

 

QT를 하며 열심히 적용하지만 읽을 수록 사실인지 신화인지 아리송한 상태에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한국 사람들을 유대 역사를 기준으로 변화시키고 구원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이 땅의 오랜 역사에서 생명을 보살펴 오신 하나님, 유대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 땅의 하나님, 온 인류의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때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도 예전에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바람직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지요.

 

지금 주일학교 다니는 어린이들처럼, 또 나이가 들어도 그 신앙에 그대로 머물고 있는 신자들처럼, 하나님은 하늘 높은 보좌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천국에 못 갔는데 ‘예수님을 몰라서 그렇다’는 전도사님의 말에 시험이 들기 시작 한 것이지요.”

 

사람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당시 명색이 중등부 회장인데 그런 내색은 할 수 없었고,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나갔지만 의문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쳤다는 간증을 했고, 방언을 하는 사람, 성령의 뜨거운 불을 받아서 방방 뛰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저도 이들 사이에서 간절히 기도를 했고 금식도 해 봤습니다.

 

방언은 못 했지만 실제로 어떤 뜨거운 열기를 마음속으로 느끼기도 했지요.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면서 원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여기저기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신학 공부를 하면 할수록 성경이 달 자체라는 확신도 약해졌습니다.

 

성경은 달을 가르키는 상징이 아닌가 싶었지요.

 

성서는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성서 기록자들이 그 시대의 과학과 문화의 한계를 안고 쓴 역사적 산물이 확실했습니다.

 

구전된 이야기들이 문서화 되면서 다양한 자료들이 편집되었고, 후대의 번역 과정에서 성서 본문들이 수정, 첨가, 삭제되며 다양한 사본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아가서, 전도서, 잠언 등은 예루살렘 멸망 이후 AD90년에 유대 신학자들의 모임인 얌니아 회의에서 구약으로 편입이 확정된 것들입니다.

 

신약성서도 요한복음의 ‘간음한 여인’이야기는 독립적으로 전승되어 따로 돌아다니던 기록인데 나중에 요한복음에 편입 되었지요.

 

마태복음의 ‘동정녀’라는 단어는 약 2천3백년 전 이집트에서 히브리어를 희랍어로 번역하는 ‘70인 역’을 만들 때 이사야서 7장의 히브리어 ‘알마’를 희랍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단어입니다.

 

알마는 ‘젊은 여자’란 뜻인데 이것을 ‘파르테나’ 즉 ‘처녀’라는 희랍어로 번역한 것이지요.

 

어떤 분들은 그런 번역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며 ‘알마’가 사실은 처녀라는 뜻이 더 많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성경을 좀 더 객관적인 눈으로 보기 시작했고 기독교가 깨달음과 이성의 종교가 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창세기를 시작으로 성경에 나오는 신화적 표현을 문자적으로 읽을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 성경의 참된 메시지를 얻기 위해서 지성의 희생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이러한 성서 해석에 대한 예를 한가지만 들겠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나보다 더 큰일도 하리라’ 고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요?

 

무언가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닐까요?

 

어찌 감히 제자들이, 혹은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이 말이 성경에 있어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 했다면 바로 사단 되는 거지요.”

 

사람들이 웃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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