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바는 다음 날 가게를 찾아온 루브리아에게 비너스상을 건네주었다.
마침 아버지가 계셔서 서로 얼굴만 보고 별 대화를 못하고 헤어졌으나, 며칠 후 그녀에게서 서신이 왔다.
<바라바님, 안녕하세요? 저 루브리아예요.
바라바님이 골라 주신 동상이 참 마음에 들어요.
며칠 전 아빠 사무실에서 우연히 만나 반가웠어요.
바라바님이 어떤 일로 오셨는지 아빠에게 물어봐도 알 필요 없다며 대답을 안 하시네요.
저를 아직도 어린애로만 생각하세요.
제가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저는 어머니의 얼굴도 모른답니다.
아버지께 어머니의 얼굴이 어떠셨냐고 물으니, 리시포스가 만든 비너스 여신상의 얼굴과 똑같다고 하셨어요.
제가 어머니 생각이 날 때 비너스상을 대신 보려고 그동안 몇 개 샀는데, 이번 것이 왠지 어머니를 더 닮은 것 같아요.
유대인은 ‘여호와’라는 신만 믿는다고 들었어요.
로마처럼 신들이 많이 있는 것이 더 재미있고 그럴듯하지 않나요?
어차피 신은 조각으로밖에 볼 수 없으니까요. 저는 솔직히 여러 신을 믿지는 않아요.
비너스 신만 빼고요. 호호.
루브리아 드림.>
바라바는 편지를 읽으며 기쁨으로 가슴이 뛰었고 즉시 답장을 썼다.
<루브리아님, 서신 받고 너무 기뻤습니다.
지난번 오셨을 때 이야기를 제대로 못 나눠서 무척 아쉬웠어요.
비너스상이 맘에 드셔서 저도 기쁩니다. 어머니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얼굴도 모르신다니 마음이 아프군요.
저도 어머니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유대 민족이 믿는 여호와는 위대하십니다.
사실 그날 루브리아님을 처음 만나고 갑자기 어려운 일이 생겨서, 다시 못 만날 뻔했을 때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또 볼 수 있게 해달라고요. 그런데 바로 그날 그렇게 만나게 해 주셨어요.
루브리아님이 어머니를 닮으셨군요. 눈동자가 아마 똑같으셨을 거예요.
제가 얼마 전 헬몬산에 올라가서 따온 석청이 좀 있는데 나중에 뵐 때 드릴 테니, 아버님과 같이 드셔 보세요.
피로 회복과 피부 미용에 아주 좋습니다.
그럼 시간 되실 때 또 뵐 수 있기 바라며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바라바 드림
추신: 제 본명은 예수이지만, 사람들은 바라바라고 부른답니다.>
루브리아에게 보낸 서신의 답장을 기다리던 바라바는 며칠 전에 만난 근위대 백부장의 방문을 받았다.
평상복을 입고 온 그는 언뜻 보면 털털한 옆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었다.
예리한 눈빛을 숨기고 슬쩍 가게를 휘둘러본 후, 백부장이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우리는 로마제국을 위해 뜻을 같이한 동지입니다. 바라바 동지, 앞으로 잘 부탁해요. 내 이름은 ‘루고’입니다.”
“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맙소이다. 하하.”
너털웃음을 웃는 그는 수완 좋은 수사관의 자질을 타고난 것 같았다.
루고가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바라바에게 물었다.
“최근에 사무엘을 만나 보았나요?”
“아직 일부러 안 만났습니다.”
“생선가게 주인 사무엘은 가버나움 열성당원 중에서도 상당히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틀림없어요.
행동대원으로 세례 요한을 따라다니던 젊은이도 몇 있는데 지금 더 파악 중이고...”
바라바는 가슴이 뜨끔했으나 내색을 하지 않고 질문했다.
“제가 어떤 일을 해야 하나요?”
“이제 사무엘을 만나서 그 조직에 들어가 열성당의 지도부 명단을 파악해야 하오.
급히 서둘지는 말고 그물을 크게 던져 일망타진해야 합니다. 진전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에게 와서 알려 주시오.”
“네, 알겠습니다. 사무엘을 곧 만나겠습니다. 그런데 근위대장님의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로무스님이시오.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분으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셨지요. ”
루고는 또 들릴 곳이 있다며 바라바와 악수를 하고 가게를 나갔다.
바라바는 다음 날 아침 나발이 일하는 광장 호텔로 갔다.
그는 19살로 열성당원 중 나이가 어린 편이나, 두뇌 회전이 빠르고 뚝심도 있었다.
가버나움에서 제일 큰 호텔에서 일하고 있어서, 시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소문은 대부분 그의 귀를 거친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는 바라바의 얼굴을 본 나발이 손님의 짐을 들어주다가 살짝 목례를 했다.
곧 나갈 테니 호텔 밖 옆 골목에서 기다리라는 뜻이다. 조금 기다리니 나발이 나왔다.
“형님, 갑자기 웬일이세요?”
“아몬과 헤스론에게 당분간 사무엘 님 가게에 가지 말라고 전해라. 너도 물론이고.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내가 다시 할게.”
나발이 고개를 끄덕이고 호텔로 돌아갔다.
생선가게 근처에 루고가 잠복해 있으므로 우선 가까운 동지들에게 알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발과 헤어진 바라바는 생선가게로 갔다. 북적대는 아침 시간이 지나서 가게는 비교적 한산했다.
사무엘 님은 잠깐 자리를 비웠고 딸내미가 반갑게 맞았다.
“바라바 오빠, 그러지 않아도 아빠가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오빠를 만나려 하셨어.”
그녀의 귀염성 있는 얼굴이 이제 성숙한 여인의 티가 났다.
“고맙긴 뭐. 사라, 너도 그동안 잘 있었지?”
“잘 있긴, 오빠도 안 오는데 뭐가 잘 있어.”
어려서부터 한동네에서 같이 자란 사라는 바라바를 친오빠처럼 따랐다.
“아빠가 근위대에 끌려갔을 때 오빠가 도와줘서 금방 풀려나셨다며? 처음에 우리가 생선에 독을 탔다고 의심했다더라고.”
사라는 아버지가 열성당원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 말도 안 되지. 요즘 장사는 어때?”
“음, 우리야 뭐 괜찮아. 아빠가 오실 때가 되었는데…. 아, 저기오신다.”
가게로 들어오며 바라바를 본 사무엘은 두 팔을 벌리고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야, 네가 그렇게 센 사람인 줄 몰랐다. 거기 끌려가서 그날 바로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대. 그 안에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있니?”
바라바는 혹시 벌써 자기를 의심하나 생각도 해 봤지만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았다.
“아니요. 아무 잘못도 없으시니까 그렇지요.”
“여하튼 참 고마웠다. 오늘 온 김에 생선 좀 많이 가지고 가라.”
“제가 따로 드릴 말씀이 좀 있는데요.”
“그래? 그럼 저 건너 공원 벤치에 나가서 얘기할까?”
바라바가 그를 따라 몇 걸음 나서는데, 앞 가게에서 누군가가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루고 백부장이 심어 놓은 사람이라 생각하며 바라바는 모르는 척 선생을 따라갔다.
시원한 감람나무 그늘 벤치에 앉으며 사무엘 님이 물었다.
“그래,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니?”
“네, 실은 제가 열성당 당원이에요.
아몬이 그러는데 선생님도 당원이시라면서요?”
바라바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허, 아몬 녀석 입도 싸네.
너는 왜 열성당원이 되었니?”
“음‥. 원인 모를 화재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복수를 하고 싶었어요.”
“그렇구나‥. 난 이번에 끌려갈 때 사실 속으로 아찔했다.
열성당원인 것을 혹시 눈치챘나 했는데 생선 독 운운하기에 안심했지. 너에게는 뭐를 물어보던?”
“선생님을 언제부터 알았느냐, 평소에 생선 자주 사 먹었느냐, 뭐 그런 거였어요.”
바라바는 주위를 한 번 살피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선생님, 제가 이번에 근위대에서 안 사실인데요. 그놈들이 선생님이 열성당원인 것을 눈치챈 거 같아요.”
사무엘이 움찔하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나를 붙잡아 갔었구나. 근데 왜 풀어줬을까?”
주위 사람들을 더 파악하여 모두 잡으려는 의도라고 바라바가 설명해 주었다.
“아, 너 아니었으면 주위의 여러 동지가 다 붙잡혀 큰일날 뻔했구나.
너도 각별히 조심하고, 당분간 여기 안 오는 게 좋겠다.”
두 사람은 공원 벤치에서 조용히 같이 일어났지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