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셀의 말이 이어졌다.
“많이 힘들고 원통하겠지만 우리가 곧 범인을 잡을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네, 고맙습니다. 아셀 님.”
“그럼 나중에 또 오겠습니다.”
아셀이 나가는 것을 배웅하고 들어온 미사엘이 감옥에서 풀려난 대원들을 사라에게 인사시켰다.
자세히 보니 모두 몰골이 말이 아니었고 다리를 심하게 저는 사람도 몇 명 있었다.
“얼마나 고생이 심하셨어요… 아버지께서는 매일 여러분들 걱정을 많이 하셨고, 석방을 위해 애쓰셨어요.”
미사엘이 대답했다.
“저는 비록 사무엘 님의 지시를 직접 받지는 않았지만, 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미사엘은 나이가 마흔은 된 듯싶었고 세상 풍파를 많이 겪어선지 침착하고 통솔력이 있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해 주셨다니 큰 위로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발이 말했다.
“사라야, 미사엘 님과 다 같이 식사라도 하고 오는 게 좋겠다. 요기도 못 했을 텐데….”
“아니 나는 괜찮으니까 힘들게 오신 분들 네가 좀 모시고 다녀와.
헤스론 오빠하고 나는 여기에 있을게. 바라바 오빠도 언제 올지 모르고….”
미사엘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우리는 곧 가 봐야 합니다.
지금 몸이 불편한 사람도 있고 오늘은 잠깐 문상만 드리러 같이 왔으니 내일 제가 또 오겠습니다.”
“아, 정 그러시면 내일 뵙지요.”
미사엘 일행이 돌아간 후에도 사무엘의 사망 소식을 듣고 시장 사람들과 단골손님들 여럿이 달려와 사라를 위로해 주었다.
미사엘은 집으로 돌아가며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누가 범인일지 전혀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단독범은 아닌 것 같다는 것과 독살이라면 같이 식사를 한 사람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어떤 일이 열성당 안에서 벌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사무엘 님의 그동안의 행적으로 볼 때 로마의 앞잡이라고 누명을 쓰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검은 유대 전통 소복을 입은 사라의 슬픔에 젖은 얼굴이 떠올랐다.
범인을 하루속히 잡아내어 사라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몇 달 만에 햇빛을 정면으로 보고 걸으니 눈이 부셨고 쇠사슬에 매여 있던 발목이 부어서 걸음이 불편했다.
심한 고문에도 사무엘 님이 가버나움 열성당 보스라는 사실을 토설치 않은 보람도 없이, 살아생전 뵙지도 못했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다른 대원들은 사무엘 님의 열성당 내에서의 신분을 잘 몰랐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열성당 내부에 범인이 있다면 사무엘 님의 신분을 아는 자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 님이 안 계시면 열성당 보스가 될 수도 있는 사람…
설마 아셀 형님이?
미사엘은 곧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햇빛이 낮아지며 계속 눈을 파고들었다.
저녁 무렵에 바라바가 아버지를 모시고 사라에게 왔다.
사무엘 님의 시신에 머리를 숙인 요셉 님의 모습이 침통했다.
요셉 님이 사라와 오랜 포옹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사라야, 사무엘 님은 의인이시다. 어떤 모함의 올가미도 결국 풀리게 되어있다.
인간적으로는 너무 가슴 아픈 일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
나도 언제 어떻게 사무엘 님을 따를지 모르나, 우리의 소망은 하늘나라에 있으니 믿음과 기도의 힘으로 하루하루 잘 견디고 이겨내기 바란다.”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바라바도 사라를 안고 무슨 말을 했지만,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라가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럼 나는 먼저 가 볼 테니 너희는 사라와 저녁이라도 나가서 하도록 해라.”
아버지가 헤스론과 나발을 보며 말씀하셨다.
바라바는 반듯이 누워계신 사무엘 님을 보며, 사라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분노의 마음을 억제키 어려웠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모른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신 것 같았다.
더군다나 배신자라는 모함까지 받고 있다니…
바라바는 아버지를 문까지 배웅하고 들어와 사라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사라야, 내가 원수를 꼭 갚아줄게. 맹세하마!”
사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헤로디아는 루브리아를 확실히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방법을 생각 중이었다.
헤롯가의 친척과 혼사를 맺게 해 주고 싶지만, 자칫 칼리굴라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도 있다.
우선 가지고 있는 보석 중 루브리아에게 어울릴 만한 진주 목걸이를 골라 놨다.
색깔과 크기가 거의 같은 알이 굵은 진주 40개를 엮어서 만든 목걸이였다.
진주 하나하나도 값지지만, 이렇게 모으는 것 자체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얼마 전부터 루브리아를 궁으로 들어오라고 했는데, 눈이 불편하다며 오지 않다가 오늘 온다고 하여 기다리는 중이었다.
까맣고 부드러운 천위에 진주 목걸이를 동그랗게 펼쳐놓으니 영롱한 오색 빛이 공기 속의 가루처럼 올라왔다.
루브리아가 왔다는 시녀장의 보고에 즉시 들어오라고 했다.
“왕비님, 죄송합니다. 진작 왔어야 했는데 갑자기 눈이 안 좋아져서 늦었어요.”
루브리아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괜찮아 루브리아, 눈이 어떻게 안 좋은가?”
그녀는 눈 상태를 설명해 주고, 탈레스 선생이 치료하러 오신다는 말도 했다.
“그 선생이면 별로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의술이 뛰어나고 경험도 많은 분이니까.
우리도 얼마 전에 감기가 심해서 오시라고 했었지.”
“그러시군요. 어머나! 이 진주 목걸이 참 아름답네요.
하나같이 크고 고운 진주알을 어떻게 이렇게 많이 모았을까요.
왕비님께 참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래, 참 아름답지. 나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람에게 주려고 이렇게 꺼내 놓았어.”
루브리아가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이 목걸이의 주인은 이제부터 루브리아야.”
“어머,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이런 목걸이를 해요?”
“괜찮아. 내가 조카처럼 생각하고 주는 거니까 어서 해 봐.”
루브리아가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들고 목에 걸쳐보았다.
“와, 정말 잘 어울린다.” 헤로디아가 손뼉까지 치며 환호했다.
“정 그러시면 제가 좀 하다가 나중에 다시 돌려드릴게요.”
“음,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목에 하고 가.”
루브리아에게 직접 목걸이를 걸어주는 왕비의 얼굴을 가까이 보니 이제 그녀도 예전 같지 않았다.
갸름한 얼굴에 매혹적인 자태로 헤롯왕을 정신 못 차리게 한 미모도, 어느새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럼 눈도 불편할 텐데 얼른 가서 쉬고 다음에 또 와, 루브리아.”
“네, 왕비님. 목걸이 정말 고맙습니다. 아빠에게도 말씀드릴게요.”
“로무스 대장님도 안녕하시지? 탈레스 선생께도 안부 전해줘.”
왕비와 만나고 나오는 루브리아의 목에서, 오색 빛을 발하는 진주 목걸이를 본 시녀장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