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리아는 어제 받은 칼리굴라의 서신을 다시 읽어 보았다.
<친애하는 루브리아!
며칠 전, 나는 꿈을 꾸었소.
우리가 어렸을 때 게르만 전장을 뛰어다니며 같이 놀던 꿈이었소.
꿈속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도 활짝 웃으시며 두 팔을 벌리고 나를 안아주셨지.
노란 민들레꽃을 꺾어서 내가 루브리아의 머리에 꽂아 준 기억도 난다오.
발보다 큰 로마 군화를 신고 뛰어다니던 나를 사람들이 ‘칼리굴라’라고 불렀고 지금도 사람들이 그런 애칭으로 부른다오.
그때 루브리아는 어린 나이였지만, 크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돋보여 흑진주라 불렸지요.
추억은 보물보다 귀한 자산이오. 도둑맞을 염려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 행복했던 시절을 같이 나눌 수 있는 루브리아가 있어서 행복하오.
우리가 자주 만날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로마제국의 영광이 그대에게 항상 깃들기를 빌며.
- 가이우스(칼리굴라) 씀>
어렸을 때 장난꾸러기였던 칼리굴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은 다음 황제가 될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지만 루브리아는 별로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칼리굴라도 순수한 어린 시절에 만났던 인연을 귀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서신을 읽을 때도 역시 주위가 흐릿해 보여서 마음이 답답했다.
며칠 전에 바라바를 만난 후 유타나가 전한 말이 기대되었다.
예수 선생이 보인 여러 이적 중에서 눈이 안 보이는 사람도 고쳤다는 이적이 그것이었다.
이 일은 주위에 소문도 많이 나서 그 사람 이름이 ‘바디메오’라는 것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아마도 지금쯤 바라바 님이 예수 선생을 만나서 치료를 부탁했을 것이다.
노크 소리가 나며 유타나가 들어왔다.
“아가씨, 눈 약초 다시 만들어 왔어요.
예수 선생이 하필 이런 때 어디 다른 도시에 가셨나 봐요. 빨리 오셔야 할 텐데요.”
“곧 오시겠지… 바라바 님 아버지는 유대교 중 어떤 파인지 아니?”
“네, 요셉 님은 에세네파라고 들었어요.”
“그러시구나. ‘에세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경건한 자들’이란 말인데….”
“에세네파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그들은 금욕을 미덕으로 여기고, 채식을 하지.
재산도 공동으로 관리하여 빈부의 차이가 없고, 옷이나 신발도 다 떨어져야 다시 사고, 흰옷을 입고 다닌다는데, 요셉님도 그러신가?”
“요셉 님은 전통적인 에세네파는 아니신 것 같아요. 아무래도 가게를 운영하다 보면 그러기가 쉽지 않겠지요.
에세네파 쿰란 공동체에는 100세 이상 산 사람도 많다는데, 채식과 절제된 생활을 해서 그런가 봐요.”
루브리아가 책장에서 에세네파에 대한 기록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에세네파 회원이 되려면 신청서를 낸 후 1년을 얼마나 청빈하게 금욕생활을 하는지 지켜본 후, 2년간을 또 성품 테스트를 해서 결정한다.
또 결혼은 배우자가 될 여자를 적어도 3년간 지켜보고, 생리가 3번 이상 정상적으로 관찰되어야 할 수 있다.>
“어휴, 에세네파 여자들은 결혼하기가 좀 피곤하겠네.”
“호호, 글쎄 말이에요.”
“눈이 흐릿해서 더 못 읽겠는데, 에세네파는 그리스의 스토아학파와 비슷한 면이 있구나.
스토아학파도 개인적인 욕망을 누르며 선을 추구하는 삶을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그들은 인간을 선으로 이끄는 위대한 의지를 믿는데, 그 의지가 신격화되면 종교로 변할 수도 있을 것 같네.
스토아학파를 시작한 제논이 300년 전 사람이니까 에세네파가 혹시 제논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스토아학파 말고 또 다른 큰 학파가 있는데 뭐였지요?”
“에피쿠로스학파 말하는 것 같구나.”
“네. 맞아요.”
“에피쿠로스학파는 행복을 인생의 가장 큰 덕으로 삼는 학파로, 지금 로마에서 많은 지식인이 그 사상을 따르고 있지.
그들은 언뜻 즐거움이나 쾌락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모든 일에서 어느 쪽으로든 치우치지 않고 중도를 지켜야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단다.
즉, 세상에서의 성공만 생각하는 물질주의와 극단적 절제를 통해 행복해진다는 신비주의는 둘 다 너무 지나치면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거지.
또 그들은 행복을 방해하는 것은 두려움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움을 없애는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중 하나는 환상을 버리는 태도란다.
두려움의 대부분은 있지도 않은 것을 만들어 내는 마음의 환상에서 비롯된다고 보기 때문이지.”
“그렇군요, 아가씨는 정말 그리스 철학을 많이 아시네요!”
“두 학파가 다 선을 언급한 것을 생각하니, 내가 좋아하는 유대인들의 경전 한 구절이 떠오르네.”
루브리아가 눈을 감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외어 나갔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어머, 아름다운 시를 음률에 맞추어 읊으시네요.”
바라바는 예수 선생이 *에브라임에 은거하고 있으며 제자들도 같이 있다는 말을 듣고 에브라임으로 향했다.
고산지대 이곳저곳 수소문 끝에 그들의 거주지를 찾았다.
오랜만에 만난 시몬이 반가워했다.
“바라바, 여기까지 웬일인가? 용케 잘 찾아왔네.”
“응, 사실은 급히 좀 도움을 받을 일이 있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다 도와야지.”
시몬의 시선이 바라바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시력을 잃어 가고 있는데, 의사들이 고칠 수가 없다네.
그래서 예수 선생님께 부탁을 좀 드리려고.”
“어떡하나… 지금 선생님이 일절 사람을 안 만나고 기도만 하고 계셔.
소문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에도 몰래 피신해서 오신 거야.
가야바 대제사장이 선생님을 사형시키는 법안을 얼마 전에 통과시켰어.”
말을 계속하는 시몬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물론 사형은 빌라도가 집행해야 하지만, 유대 의회기관인 산헤드린에서 결정이 되었어.”
“그럼 이제 가버나움에는 안 나오시나?”
바라바의 목소리도 힘이 없었다.
“곧 가실 겁니다. 집에 가 계시면 우리가 알려드릴게요.”
옆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요한이 말했다.
*전도서 3장 11~12
*에브라임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