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열성당 당원들을 성전에서 잡아들이기는 했으나,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인명 피해가 난 것이 로무스의 마음에 걸렸다.
유대 민족의 특성상 그들은 반드시 이에 상응하는 보복을 계획하고 있을 것이다.
로무스가 앞에 앉아 있는 루고 백부장의 의견을 물었다.
“열성당은 보복을 하려 하겠지?”
“네, 대장님 말씀대로 그들은 복수를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바라바는 요즘 만나 보았나?”
“네, 얼마 전에 만났는데 아직 특별한 진전이 없습니다.
일단 사무엘을 다시 잡아넣고 그들의 움직임을 보는 건 어떨까요?”
로무스는 바라바와 루브리아가 간혹 만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라바를 내가 먼저 만나 보겠네. 내일이라도 이리로 오라고 하게.”
루고가 나간 후 로무스는 오랜만에 계피차를 타 마시며, 오래전 세상을 떠난 루브리아의 엄마를 생각했다.
로무스는 나폴리 태생이었다. 온화한 기후와 밝은 햇빛으로 그곳 주민들은 대개 낙천적이고 사교적이었다.
로무스의 아버지는 당시 티베리우스 장군의 부관으로,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그 영향으로 로무스도 어려서부터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사람들은 5가지 계급, 즉 원로원, 기사, 시민, 해방노예, 노예계급으로 구성되었다.
로무스의 아버지는 최고 계급인 원로원으로 신분이 상승할 기회가 있었지만 군인은 전장에 있어야 군인이라며 기사 계급을 고수했다.
로무스는 30대 초반에 천부장으로 승진하여 황제의 별장이 있는 카프리섬에서도 근무하였다.
별장은 카프리섬의 북쪽 절벽 위에 있어서 나폴리 연안의 잔잔한 바다 풍광과 베수비오산의 웅장함이 한눈에 들어왔다.
소피아를 만난 것은 어느 해 여름, 친한 친구의 결혼 만찬에 참석했을 때였다.
그녀는 신부 측 친구 중 뛰어난 미모와 상냥한 미소로 좌중의 이목을 끌었다.
로무스는 옆에 있는 친구에게 저 여자가 누구인지 물어보았다.
“소피아라는 여자인데 나폴리 최고의 미인이라고들 하더군.
아버지가 원로원 의원으로, 티베리우스 집정관과도 잘 아는 사이라고 하네.”
“아버지가 누구건 간에 저 정도라면 남자 친구가 많을 것 같아.”
이런 대화를 나누는데 소피아가 로무스 옆쪽으로 오면서 디저트와 차를 나누어 주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신랑 친구 로무스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네, 소피아에요.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녀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향이 강한 차를 로무스에게 따라 주었다.
“무슨 차인가요? 냄새가 좋습니다.”
로무스가 그녀의 크고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네, 계피차인데 제가 좋아하는 차입니다. 많이 드세요.”
이후 두 사람은 몇 달간의 데이트 과정을 거쳐 주위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했고, 엄마를 꼭 닮은 루브리아가 태어났다.
아마 이때가 자기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로무스는 늘 생각했다.
이후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되자 로무스는 로마에 새로 창설된 근위대로 가게 되었는데, 가족들은 살림을 정리하고 두 달 후에 오기로 하였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것은 로마에서 근무한 지 한 달쯤 지난 후였다.
소피아가 카프리섬에 친구들과 놀러 가서 수영을 하다가 바다에서 그대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루브리아가 한 살도 안 된 때였다.
이후 20여 년이 지났으나 로무스는 재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다.
그동안 게르마니쿠스 장군을 따라 여기저기 험한 지역을 다닐 때도 루브리아는 꼭 데리고 다녔고, 어린 그녀는 장군의 아들 칼리굴라와 함께 부대의 마스코트였다.
밝은 태양이 내리쬐는 짙푸른 바다를 볼 때면 언제나 소피아가 환히 웃는 모습이 수평선 위로 떠 올랐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울 수는 없으나 루브리아를 위해 어려서부터 개인 교사들을 집으로 불렀다.
그 덕분에 루브리아는 철학, 역사, 예술, 종교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여러 나라의 종교에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사실 로무스는 알렉산드리아로 갈 수 있었으나, 루브리아가 유대교에 특히 관심이 많아 현지에서 공부도 할 겸 이 땅에 온 것이다.
루브리아는 성격이 밝고 적극적이어서 남자를 사귀게 되면 단기간에 가까워질 것이다.
바라바가 준수하고 총명한 젊은이 같긴 하지만, 루브리아에게는 로마 원로원 집안의 청년 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골라 주고 싶었다.
딸의 마음이 바라바에게 너무 기울기 전에 대화를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계피차를 다 마실 때쯤 노크 소리가 나며 루브리아가 들어왔다.
“어머, 계피향 냄새가 참 좋네요. 아빠, 오늘은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루브리아가 아빠의 뒤로 와서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혹시 갖고 싶은 옷이나 책을 어디서 보았니?”
어머니 없이 전장을 누비며 키운 아이라 마음 한구석이 늘 아픈 로무스는 루브리아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해 주고 싶었다.
“제가 갖고 싶은 것은 없고요, 다음에 로마에 갈 때 바라바를 로마로 초청하고 싶은데 허락해 주세요.”
“요즘 바라바와 자주 만나니?”
“자주는 아니지만, 며칠 전에 유대 랍비 글로바의 강의에 같이 다녀왔는데 참 좋았어요.
제가 바라바에게 유대교를 배우는 대신 저는 로마 구경을 시켜 주고 싶어요.”
“그 문제는 나중에 다시 상의하자. 아직 언제 로마에 갈지도 모르고….”
루브리아는 아빠의 안색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고 더 조르려다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