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금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그녀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아무 말 없이 우울한 표정으로 듣고 있는 선희의 모습이 신문사 기자보다는 탤런트가 더 어울릴 성 싶었다.
갸름한 얼굴에 쌍꺼풀 없는 맑은 눈, 끝이 살짝 올라간 오똑한 코, 백설귀같이 하얀 피부는 화장을 안 해도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선희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고개를 들고 서준을 바라보았다.
“준기 오빠가 저를 위해서 그랬나 본 데 그 문제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손준기가 친척 오빠인가요?”
“네“
선희가 짧게 대답하고 김밥위에 떡볶이 소스를 숟가락으로 떠 얹었다.
점심에 전복죽 밖에 먹은 게 없다는 생각에 서준도 갑자기 시장기를 느꼈다.
지금까지는 대화가 잘 풀리고 있으니 서두르지 말고 식사를 좀 하면서 나중에 처벌 불원서를 다시 언급하는게 좋을 것 같았다.
잠시 아무 말 없이 김밥과 떡볶이를 먹으니 접시가 거의 비어갔다.
“이 집 음식이 맛은 있는데 너무 양이 작네. 1인분씩 더 시킬까요?”
“저는 김밥 만 해도 될 것 같아요. 떡볶이 소스 많이 남았으니까 이거 찍어 먹을게요.”
서준이 음식을 시킨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순서가 바뀌어서 미안해요. 상을 당한 사람에게 위로의 말도 못했네.
갑자기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해 너무 힘들었지요?”
금방 다시 눈가가 벌개지면서 선희의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어차피 얼마 오래 못 사셨을거에요.”
선희 엄마 김혜순씨는 당뇨와 고혈압이 심했고 반년 전 정기 검진에서 위암이 발견되었는데 이미 다른 장기에도 퍼져서 1년을 넘기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방사선 치료를 3-4번 했지만 암이 줄어들지 않았고 화학 요법을 몇 번 받은 후 시골에 가서 요양을 하다가 새빛교회를 나가게 된 것이다.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을 통보 받으면 어떤 사람은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커 그 자체로 삶이 단축되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마음을 비우고 단순한 생활과 철저한 식이요법으로 의사의 예상보다 훨씬 오래 살거나 기적적으로 완치되는 경우도 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살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다.
현대의학에서 밝혀진 것은 이러한 긍정적인 생각이 뇌에 화학작용을 일으키고 이러한 변화가 환자의 몸에 그대로 전달되어 치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플라시보(가짜약) 효과도 같은 이론인데 환자가 약을 복용하면서 약이 진짜라고 믿으면 약 25%정도가 효과를 보게 된다.
"음, 그러니까 새벽 기도에 병을 고치러 나가셨군요.. 선희씨도 같이 갔었나요?”
“네, 사실은 그 교회에 제가 먼저 나갔어요”
그녀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참치 김밥이 한 접시 나왔고 대화가 중단 되었다.
음식점 넓은 유리창에 가는 빗줄기가 점점이 흐르는 것이 서준의 눈에 띠었다.
오늘 비 온다는 예보는 없었는데 잠깐 지나가는 비 같았다.
“사고가 나기 전 날 설교제목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었어요.”
느닷없이 성경 말씀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서준이 김밥을 꿀꺽 삼키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난 번 신목사님을 만났을 때 물어 봤어요.
엄마의 교통사고도 하나님의 뜻이고, 그게 선이라면 신목사님과 택시기사, 딸인 저까지도 합력한 건가 하고요.”
빗줄기가 오히려 거세져서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어머, 나 우산 안 가지고 왔는데…”
그녀가 몸을 돌려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걱정말아요. 바로 옆에 편의점이 있던데 내가 나중에 얼른 우산 하나 사가지고 올게요.
그래서 신목사가 뭐라 하던가요? “
“아무 대답도 안 하시고 미안하다며 잠시 후 돈을 꺼내 주셨어요.
처음에는 사양했는데 목사님의 마음에 감동이 되어 받았어요.”
이 후 방주가 자신을 추행 했다는 말을 하기는 부끄러운 듯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남성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신목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녀를 믿을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방주가 국민 참여 재판을 신청 한다면 틀림없이 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실 여부를 거론하는 것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준이 반쯤 남은 소주잔을 비우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희씨가.. 여하튼 신목사의 따스한 마음을 생각해서, 처벌 불원서를 좀 써주면 고맙겠어요.”
짧게 한 숨을 내쉬고 그녀가 대답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신목사님이 좋으신 분인 거 저도 잘 알아요.
내일 오빠와 상의하고 곧 연락 드리겠습니다.”
상의 한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으나 일단 큰 고비는 넘긴 듯 했다.
“정말 고마워요. 빨리 좀 부탁해요.”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밖에서 쏟아지는 빗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가게 주인에게 빌린 우산을 쓰고 30 미터쯤 떨어진 편의점에 가서 접는 우산을 사왔다.
우산은 생각보다 작았고 선희 쪽으로 펼치며 걷다 보니까 서준의 왼 쪽 어깨가 비에 젖기 시작했다.
“최기자님도 교회 다니시나요?”
그녀의 목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렸다.
“잘 안 다녀요.”
“펄 시스터스가 부른 ‘빗속의 여인’ 이란 노래 아세요?”
서준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선희가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더니 능숙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잊지 못 할 빗속의 여인.~ 그 여인을 잊지 못하네.~
노오오란 레인코트에, 검은 눈동자 잊지 못하네.~'
우산 손잡이 옆으로 살짝 보이는 그녀의 동그란 이마에 뽀얀 솜털이 나 있었다.
“가수 해도 되겠네. 나도 이 노래 참 좋아해요.”
“우리 엄마 18번이에요. 저는 노란 레인 코트 대신 노란 티셔츠 입고 있네요. ㅎㅎ”
서준의 왼쪽 어깨가 축축해졌으나 지금 그 것을 신경 쓸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