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C 기독교광장’ 에는 문교수의 예측대로 하루 사이에 댓글이 여러 개 달려 있었다.
‘내가 믿는 하나님’ 이란 그의 글에 대한 비판이 많았으나 그런 비판 글에 다시 댓글을 달아서 문교수의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게 토론의 광장이 마련되는 자체가 문교수가 바라는 일이었다.
유럽이나 미국의 교회에서는 토론 문화가 활발하여 폭 넓은 질문과 이에 대한 의견들을 자유롭게 발표하는데 한국에서는 이러한 광경을 보기 힘들다.
이 세상은 마귀가 공중 권세 잡고 있고, 이제 마지막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생명책에 이름을 속히 올리라는 설교를 할 수록 신자들이 더 모여들었다.
교회의 각종 모임에서도 자유로운 대화을 할 엄두를 못 내며 목사님의 말씀만 받아 적고, 토씨까지 서로 확인하며 안도한다.
문교수가 쓴 '내가 믿는 하나님' 이란 글 바로 밑에 달린 댓글은 어느 목사님이 보낸 듯싶었다.
-안녕하세요? 문교수님,
교수님이 쓰신 '내가 믿는 하나님' 은 한마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안 믿고 철학자의 하나님만 믿겠다는 뜻입니다.
즉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분리하자는 주장 아닙니까?
이것은 이미 2C 중반, 이단의 괴수였던 마르키온이 성경을 누가복음과 바울서신 중심으로 편집하여 기독교의 성경으로 새로 만들고,구약은 유대교의 신화적 흔적이므로 떼어 내야 한다는 주장과 비슷합니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도 대통령직에서 물러 난 후 소위 이신론에 빠져 성경에서 기적으로 보이는 부분을 빼고 제퍼슨 바이블을 편찬합니다.
이신론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는 하셨지만 그 후에는 세상이 저절로 움직이게 놔 두셨다는 일종의 자연주의 신관입니다.
근대에는 톨스토이도 비슷한 실수를 했는데 신약을 '요약복음' 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편찬하여 러시아 정교로부터 파문을 당했지요.
문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전도서의 한 구절이 떠 오르더군요.
“이미 있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
또한 예수님이 모든 계명 중 “네 마음과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사실 이것은 예수님의 먼저 하신 말씀이 아니고 구약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각각 레위기와 신명기에 나와 있는 말씀을 그대로 하신 것입니다.
문교수님은 성경 전체에 나오는 한 분의 하나님을 믿어야지 어느 하나님은 믿고 어느 하나님은 안 믿으면 자체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며 문교수님의 각성을 촉구합니다.
여의도 이레 드림
이렇게 비판적이 댓글에 다시 누가 댓글을 달았다.
-이레님, 안녕하세요?
제가 보기에 문교수의 말씀은 성경을 분리 하자는 뜻은 아닌 듯합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당시의 세계관으로 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으며, 수 많은 기적을 행했다고 믿었는지를 하나님에 대한 현대적 속성으로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모세의 편을 들어 이집트의 모든 장자를 살해했다” 는 성경구절의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8백년 전 중세 최고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서 해석의 방법을 4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즉 문자적, 은유적, 도덕적, 신비적인 방법이지요.
예를 들자면 '예루살렘' 은 문자적으로는 지도에 표시된 특정 장소입니다.
은유적인 해석으로는 사도 바울이 말한 “하늘의 예루살렘은 자유인이며 우리 어머니” 라는 구절이 되겠습니다.
또 도덕적인 의미나 신비적인 의미로 예루살렘이 쓰인 경우도 이래님이 잘 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렇듯 성서의 지명 하나도 이미 오래 전부터 여러가지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듯이 우리의 시야를 어느 한 곳에 고정시키지 않는 것이 어떨까요.
그 과정에서 각자 개인적인 환경이나 경험에 따른 서로 다른 신앙관을 존중 해주면 종교적 평화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요.
‘종교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없다’ 라는 말씀이 더욱 절실한 시대입니다.
어쩌면 같은 종교, 같은 기독교 내부의 화평이 더욱 어렵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깨우쳐 준 짧은 글이 있어서 21C 광장에서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진리보다 기독교를 더욱 사랑하는 사람은, 기독교보다 자기 교파를 더욱 사랑하게 되고, 자기 교파보다 자기 교회를 더욱 사랑하게 되고, 마침내는 그 어떤 것보다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게 된다”
만리재 로데 드림
두 사람의 글을 읽은 문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의 토론이 된다면 21C 광장의 장래가 더욱 넓어질 것이라 생각하며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이레님, 로데님, 두 분의 진지하고 유익한 말씀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는 신학자로서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여 어느 쪽을 지지하거나 비판하고 싶지 않습니다.
21C 신학은 그보다 더 큰 틀에서 신학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마사이족을 위해 1960년대에 만들어진 사도신경을 소개합니다.
-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유대 족속으로 오시어 작은 마을에서 비천하게 나시었다.
그 분은 집을 떠나 항상 사파리의 여정 가운데 선을 행하셨으며 하나님의 권능으로 사람들을 치유하고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가르치셨으며 종교의 의미가 사랑임을 보여 주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부했고 그 분께서는 수난 당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셨다.
그 분은 무덤에 놓이셨으나 하이에나들은 그 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
마사이족의 사도신경에는 '하이에나' 가 나옵니다.
사파리와 하이에나가 그들에게는 더욱 실감 나겠지요.”
예수님의 삶이 나타나 있는 이러한 마사이족의 사도신경이 재미있습니다.
-문익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