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교단 김훈두 총회장의 사퇴서가 나왔고, 노회에서 한 차례 만류하는 과정을 거친 후, 그 분의 뜻을 존중하기로 의결했다.
다행히 아직 10년전 성가대원의 #미투가 터지지 않았고 S교단이나 김훈두 개인으로서도 최선의 수습이었다.
매주 발간하는 교단 신문은 총회장의 사퇴가 후배들을 위한 숭고한 결단이며,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본보기 자체라고 칭송했다.
총회장 보궐 선거 공고가 나왔고 이동구 학장을 비롯한 6명의 후보가 등록했다.
문교수는 방학 동안 만이라도 연구실에 나와서 새사도신경에 대한 기자회견이나 세미나를 주관해달라는 이학장의 간청을 받아 들였다.
새사도신경 발표에 대한 반응이 뜨거운데 당장 연락처가 없는 것도 난처한 일이고, 대표 고문 직을 완강히 거절한 것도 조금 미안했다.
21C광장에는 새사도신경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과 기독교 전반에 대한 자유로운 의견들이 많이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문교수님. 새사도신경 대박입니다.
요즘 가끔 교회를 가거나 QT 모임에 참석 해보면 아직도 3천년 전의 이스라엘 부족신을 공부하며 열심히 현실에 적용하는 분들을 봅니다.
그런 신앙이 어이 없으면서 귀엽기까지 합니다.
어린 아이가 산타클로스가 온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 양말을 거는 모습을 보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지요.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라는 말을 잘 못 이해한 것 같아 슬프기도 합니다.
전통 기독교는 인간 본성을 죄 덩어리로 규정한 '오거스틴'의 영향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죄 사상은 인간성의 경멸에 기초합니다.
인간은 악만 있거나 선만 있는 존재가 아니고 불완전한 존재일 뿐입니다.
인간 자체에 대한 이해가 발전하고 변해야 종교가 진화합니다.
제우스 신이 백조나 말이 되어서 원하는 여자를 얻는 그리스 신화적 종교가 자취를 감추고, 유일신 사상의 종교가 대세를 이루었듯이, 앞으로의 종교도 없어질 신은 빨리 없어져야 더욱 발전한 종교가 나올 수 있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종교가 필요한 존재이고 그런 의미에서 새 사도신경 ‘아멘’ 입니다.-
-압구정 비둘기
댓 글들의 수준이 높았고 건전한 토론도 눈에 띠었다.
-안녕하세요. 전통기독교가 예수님과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사도신경이 확정되고 무조건 그 것을 외우기 시작한 후부터 입니다.
기독교가 예수님을 신으로 숭배하면서 그 분은 불쌍한 마술사가 되었지요.
‘월든’을 쓴 소로는 ‘교회를 다시 더 세우는 것보다 신앙에 어긋나는 일은 없다’고 했습니다.
신화나 전설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신앙이 좋다는 시대는 마녀 사냥의 시대였으나 지금도 그 여파는 남아 있고 이름을 바꾼 마녀 사냥은 계속되고 있지요.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온 거나 동정녀 잉태는 모두 history가 아니고 story입니다.
또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 해도 지금 우리가 사는 삶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 부활 하신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재림 없는 부활은 옛날 이야기 일뿐이고 기독교 역사는 재림 불발의 역사입니다.
이제 교리에 갇힌 기독교 안의 예수님을 우리의 가슴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
산호세 뒹기 -
-뒹기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오랫동안 따르던 인격적인 신을 우리가 쉽게 떠날 수 있을까요?
인간의 능력으로 알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신에게 예배할 수 있을까요?
저는 어렵다고 봅니다.
니체의 '초인 사상'도 숭고한 철학이고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도 당시에는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예측은 모두 빗나갔습니다.
인간을 과대 평가 한 거지요.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영원한 안식과 불멸을 원하는 한, 인격적인 하나님이나 성모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입니다.
창조주를 인정하지 못하면 인격적인 신을 받아들일 수 없고, 무엇보다 우리의 생명 자체를 감사해야 할 감사의 대상이 없어집니다.
종교는 인간이 필요해서, 안식과 평안을 얻기 위해서 만든, 우리를 닮은 인격적 하나님을 믿는 행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없다면 기도는 누구에게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갈릴리 올리브 -
-올리브님 안녕하세요. 산호세 뒹기입니다.
신이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신이 필요해서 믿는다는 말씀이군요.
저도 한 때는 그런 심정을 이해했으나 동시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하늘 어디에도 그런 신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산타 할아버지가 사실은 부모님이라는 것을 안 후에도 산타를 믿으려는 노력과 같으니까요.
전통 기독교는 속죄와 구원을 통한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추구했지만 신화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즉 삶의 의미와 목적을 외부의 신, 하늘 나라의 신에서 찾으려 했지요.
그런 맹목적 노력은 지금 여기서의 삶의 가치와 의미를 오랫동안 왜곡시켰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그런 전능한 신에게 여기서 돈 벌고 성공하게 해달라는 간구에 불과했지요.
다만 제가 올리브님께 어느 정도 동의 하는 부분은 기도에 대해서 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전능한 인격신을 더 이상 의지 하지 않을 때, 가장 감정적으로 어려운 부분은 기도에 대한 생각일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 줄 신적인 우리편이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기도를 할 수 없을까요?
전통적 기도를 할 마음이 없어지는 순간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편안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 놓는 순간, 나의 편견과 집착을 그치는 순간이니까요.
그 순간은 지속 되기 어렵고, 나를 초월해 있는 무엇이지만, 언제나 나 자신의 심층 속에서 나를 만나기를 갈구합니다.
이러한 만남이 기도가 된다면 그 현존은 나를 온전하도록 불러냅니다.”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며 계속 읽으려는데 이메일이 들어왔다.
런던에서 만났던 C일보 특파원이었다.
“문교수님 그 간 안녕하셨지요? 런던 C일보의 토마스 김입니다.”
짧은 머리에 돗수 높은 안경을 낀 그의 얼굴이 런던 아리랑 식당에서 파전과 소주를 열심히 먹는 모습으로 떠 올랐다.
“새사도신경에 대한 반응이 예상대로 한국과 미국에서 굉장한 것 같군요.
지난 번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오늘 아침 타임즈 신문에 로빈슨 박사님이 위독하다는 기사가 실려서 제가 마리앤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2-3일 힘드셨는데 다행히 오늘은 좀 회복 하셨다는군요.
또 한가지 드릴 말씀은 새사도신경과 연관되는 산타크로체 성당의 그림 ‘막달라 마리아 전설’에 대해 최근 새로운 논란이 좀 있습니다.
이 그림이 ‘조반니’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문교수가 바짝 긴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