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목소리는 경쾌했고 연한 장미 냄새가 휴대폰 저쪽에서 상큼하게 풍기는 듯싶었다.
“최기자님, 간단히 용건만 말씀 드릴게요.
내일 아침 나오는 D일보에 김의원님 기사가 실렸어요.
김변의 말로는 박당 기자가 D일보에 있는 친구에게 정보를 준 것 같다네요.
지금 시내 가판대에 1판이 나왔는데 가능한 내용을 줄여보기는 하겠지만 어려울 것 같아요.
참고하시라고 연락 드렸어요.”
서준이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은 후 즉시 D일보의 인터넷 판에 들어갔다.
< 뻐꾸기 새끼가 다른 알을 밀어냈다. 대한당 김영중의원의 가족사> 라는 제목 아래 김의원의 가계도가 그려져 있었고 선희와 손중기의 어린 시절 사진도 나와 있었다.
가계도는 마치 북한 김일성 왕조를 설명하는 도표처럼 김의원과 부인은 실선으로, 그 옆에 다른 부인 두 명은 점선으로 연결되어 있고 태어난 자식도 그 밑으로 한 명씩 달려 있었다.
서준이 눈으로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유명 정치인이 친자 소송을 당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자신이 조국당 실권자 L 의원이 20살 때 나은 자식이라고 주장하며 유전자 검사를 한 K씨는 1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소송 중이다.
어느 정치인은 하루 사이에 대선 주자 1순위에서 성폭행 피의자가 되었는데 만약 그런 일이 20여년 전에 벌어졌다면 어찌 되었을까?
김영중의원은 오래 전 여비서와 내연 관계로 아이까지 낳았으나 여론의 비난도 없었고 검찰의 수사도 피할 수 있었다.
4선 의원으로 대한당 정책위 의장을 하던 김의원은 10여년 전 알츠하이머 증세로 돌연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철저한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
도표에 나온 것처럼 그는 부인과의 사이에 김모 변호사를 장남으로 두고 있다.
그는 여비서 이모씨와의 사이에서 손모씨를 낳았고, 이후 유명 영화 배우 김모씨와 동거하면서 오모양을 얻었으나, 두 사람은 그의 호적에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은 상태다.
이러한 가족사는 치매를 앓고 있는 김의원의 머리에서는 지워진 지 오래이다.
또 한가지 그가 기억 못하는 가족의 비밀이 있었으니, 그것은 호적에 있는 김모 변호사가 그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결혼 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라는 것이 병원에서 밝혀진 후, 김 의원의 부인은 생후 1개월 된 아이를 비밀리에 입양하였고, 자신의 자식이라고 주위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였다.
이런 사실이 이번에 드러나게 된 발단은 김의원의 부인과 호적상 아들인 김모 변호사 사이에 재산 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김의원의 중증 치매로 법적 유산 관리인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김모 변호사가 모든 재산을 본인에게 돌려 놓은 것을 알게 된 부인이 그 동안의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다.
부인 측 대리인에 의하면 손모씨와 오모씨는 김의원의 핏줄이 확실하고, 한때 손모씨는 부인과 같은 집에서 살기도 했으나 김모 변호사의 음해로 쫓겨났다고 한다.
말하자면 종달새 둥지에 있는 뻐꾸기 알이 먼저 깨어나서, 다른 알들을 밖으로 밀어 떨어뜨린 형국인데, 이제는 어미 종달새마저 뻐꾸기가 쫓아내려 한다고 주장했다.
부인 측 대리인은 “세상 사람들은 재산 싸움은 무조건 양쪽을 비난하는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양쪽의 입장을 잘 들어보면 먼저 욕심을 크게 낸 쪽이 있고, 순리에 어긋난 행동을 먼저 한 사람이 있어서 싸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D일보의 기사는 이렇게 끝났는데 김변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내용이었다.
서준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손준기와 선희가 확실히 배다른 남매 관계라면 결혼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서준은 손준기를 직접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S경찰서에서 단 둘이 마주 앉은 서준은 긴장한 눈빛의 손에게 박카스 한 병을 건네주었다.
그 동안 고생을 좀 했는지 손의 광대뼈가 두드러져 보였다.
드드득~ 가벼운 양철 부서지는 소리가 난 후 얼굴을 크게 젖혀 박카스를 마시는 손의 목젖이 위 아래로 몇 번 움직였다.
“문교수님이 어제 귀국하셨으니 처벌 불원서를 쓰시도록 부탁하겠소.”
“문교수님께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하지만 처벌 불원서는 안 쓰셔도 됩니다. “
“무슨 소리요! 잘못하면 살인 미수로 4-5년 실형이 나올 수도 있어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손이 아무 말도 안 했다.
“사실은 방주, 신목사가 손준기씨 걱정을 많이 하고 있소.
신목사가 선희양과 곧 결혼 하는 건 알고 있지요? “
손이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다른 이야기를 했다.
“지난 번 최기자님께 이성을 잃은 행동을 보여줘서 죄송했습니다.
저도 그런 제가 싫지만 오래 전 이미 예정된 일입니다.”
그의 목에 선희가 붙여준 반창고는 없었고 오른 손등에 다른 반창고가 보였다.
“선희양과 손준기씨는 배다른 형제인데 아직도 그녀와 결혼 할 생각을 하나요?
내일 조간 신문에 김영중 의원의 가족 관계가 자세히 나올 거요. ”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는 손에게 서준이 다시 찌르듯이 말했다.
“여하튼 빨리 여기서 나와야 교회도 가지요.
오른 손등 반창고는 뱀에 물려서 붙인 거지요?”
손준기가 움찔하며 얼굴을 든 후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사도 바울도 뱀에 여러 번 물렸지요.
우리는 지금 하늘 나라의 일을 청동 거울에 비치듯이 희미하게 밖에 모릅니다.
다만 임박한 주님의 재림 후 영광의 휴거로 들어 올려지면 확실히 알게 되지요.
최기자님도 늦기 전에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세요.
이제 정말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대화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