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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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소리 2 : 그런데 내가 참 나쁜 놈이다. 햇살 소리만 생각했지 막상 나에게 햇살 소리를 듣게 해 준 할머니는 잊고 살지 …

wy 0 2020.01.31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나는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게 되면서 나는 어린 날의 샘밭 시절을 조금씩 잊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뜻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법관의 길로 향했지만 대학에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또 떨어져서 군대를 가게 되었다. 법관의 길은 멀어졌지만 군대를 마치고 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음악의 길을 걷고 있었다

내가 다른 길로 가자 아버지는 나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하지만 나는 행복했다. 나의 벗, 햇살이 내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싸늘해도 햇살은 늘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고 내가 힘들 때면 다정하게 햇살 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햇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직감적으로 나의 햇살이 병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나의 햇살을 병들게 한 걸까? 눈앞이 캄캄했다. 지금까지 햇살을 의지하고 살았는데 이젠 누가 나를 지켜 주나? 문득 어린 날의 고향이 떠올랐다

그곳에 가면 나의 햇살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나는 햇살과 처음 만났던 샘밭으로 갔다. 고향 떠난 지 삼십 년만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반겨줄 사람도 없거니와 어릴 때 풍경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세상이 적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의 삶은 견인차에 끌려가는 자동차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내가 참 나쁜 놈이다. 햇살 소리만 생각했지 막상 나에게 햇살 소리를 듣게 해 준 할머니는 잊고 살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자기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것만 생각하지 누가 그 좋은 일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햇살이라고 다 같은 햇살이 아니었다. 도시의 햇살은 그렇다 치고 고향의 햇살마저도 햇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문창호지를 사각사각 뚫고 들어오는 햇살을 찾아야 하는데 그런 햇살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궁리 끝에 나는 산에서 그 햇살을 찾기로 했다. 산에 가면 그래도 그 옛날의 햇살이 남아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창녕 사는 아우와 함께 낙남정맥* 종주를 하던 때였다. 아홉 번째 구간을 마치고 고운동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는데 어둠을 만나는 바람에 계획이 어긋나고 말았다.

나루야, 고운동은 하제* 아침에 가기로 하자.”

그때 저만치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지치고, 춥고, 배가 고파서 망설임 없이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노란 불빛으로 물든 방문이 동화책에 나오는 그림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발자국 소리에 누렁이가 짖어대고 그와 동시에 방문이 열렸다.

 

뉘시오?”

길이 어두워서요. 하룻밤만 재워 주세요.”

요즘 강도들이 많다는데······.”

할머니는 우리들이 강도가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어서 들어오라고 했다

방에 들어서자 추위는 달아났지만 방안은 그리 훈훈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낯선 사람이 나타났는데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술병을 발견할까봐 그게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큰 술병을 살며시 궤짝 옆으로 숨기고 있는 할머니의 표정이 아이처럼 귀여웠다. 아주 오래 된 흑백텔레비전에서 요즘 아이들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화면도 나오지 않고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할머니 잘 나오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뭣 땜에 켜 놓으세요?”

저 소리라도 들어야지, 안 켜놓으면 너무 심심해.”

할머니는 플라스틱 그릇에 남아있던 소주를 천천히 마셨다. 나는 할머니가 술을 감춘 것을 모르는 체 하면서 일부러 술 좀 달라고 해보았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움직여 술을 숨겨 두었던 궤짝 옆을 가렸다. 나는 웃으면서 할머니에게 마술을 보여 주겠다고 하고서는 마루에 내려놓았던 배낭에서 큰 술병을 갖고 들어왔다. 그러자 그것을 본 할머니는 눈을 크게 뜨면서 아이처럼 좋아했다.

 

술이 그렇게 좋으세요? 하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떡이며 내가 들고 있던 술을 얼른 가져다가 궤짝 뒤에 세워 놓고는 조금 전에 숨겨 놓았던 술을 다시 꺼내서 우리에게 한 잔씩 따라 주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술을 마시면 우리 애들이 보이지, 그러는 것이었다. 희미한 불빛에 비친 할머니의 얼굴에 외로움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아침이 되자 부엌에서 밥 짖는 소리가 났다. 먼 길 떠나는 아들에게 맛있는 밥을 먹여 보내려는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어쩌면 할머니는 우리를 아들이라 여겨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따뜻한 이불 속에 누워있던 나는 또 다른 소리를 들었다.

사각사각

나는 깜짝 놀라서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났다

! 이 소리는······. 그토록 찾아 헤맸던 어린 날의 햇살 소리였다. 병들었던 내 마음의 햇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강제로 헤어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나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춤추게 하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낙남정맥 : 脈 지리산 영신봉(:1,651m)에서 낙동강 남쪽을 가로지르며 김해 분산(:360m)까지 약 299km에 이르는 산줄기의 옛 이름. 

*하제 : 내일의 순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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