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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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1 : 살래골 고운 햇살 실바람 속에 빗방울꽃 송송송 노래 부르네~

wy 0 2019.12.28

실상사1

 

오래 전에 진주에 놀러갔다가 어느 도예가로부터 조그만 그릇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었다

녹차 잔으로 사용하기에는 크고 막걸리 잔으로 사용하기에는 조금 작았는데 나는 그것을 귀히 여겨 책장 빈자리에 따로 보관했다

세월이 한참 지난 어느 날 책장 정리를 하다가 그것을 발견하고는 한숨을 쉬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귀한 물건이라 할지라도 사용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귀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물이 없으면 물이 귀한 것이고 쌀이 없으면 쌀이 귀한 거지 값이 좀 나간다는 이유로 귀하게 모셨으니 내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귀한 그릇을 보관만 했지 따뜻한 눈길은커녕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고 살았다

그릇의 입장에서 보면 감옥에 갇힌 거나 다름이 없는 건데 아무 죄도 없는 그릇을 그릇으로 살지 못하게 하였으니 내가 참 못된 놈이다

나는 그 그릇에게 뒤늦은 사과를 하고 당장 사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무슨 용도로 사용할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을 손에 들고 요리조리 살펴본 나는 궁리 끝에 막걸리 잔으로 사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날 저녁 그 귀한 잔에 막걸리를 따라 마셨다. 옷이 날개라더니 술이라는 것도 잔의 모양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졌다.

넉 잔째 마실 때였다. 무슨 마법에 걸렸는지 그만 잔을 놓치고 말았다. 허무하게 깨져버린 그릇을 바라보며 나는 또 헛웃음을 지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죄 없는 너를 오랫동안 가두어 놓더니 결국 깨트리고 말았구나.

 

꽃병의 물도 자주 갈아 주지 않으면 물이 썩어 꽃이 일찍 시든다. 물론 자주 갈아 주어도 결국 시들겠지만 그래도 방치해서 시드는 것 하고는 얘기가 다른 것이다

사람도 방 안에 오래 갇혀 있으면 공기가 탁해져 머리가 띵해지고 생각도 흐려지고 몸도 망가지고 그러지 않는가. 꿈도 버릴 줄 알아야 꿈이 그리워지고 그러는 건데 계속 간직하다 보니 꿈이 시드는 줄도 모르는 것이다

비움은 채워질 때 빛나는 것이고 가득함은 비울 때 빛나는 것이다. 혹여 비움을 내세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고인 물과 다를 바 없고 가득함을 내세워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꽉 막힌 굴뚝이나 다를 바 없다

무릇 그릇이란 채우고 비우고 해야 빛나는 법, 장식용 그릇은 귀한 대접을 받을지 모르겠지만 밥상 위의 그릇처럼 편하거나 정겹지 않다.

 

가득함은 비움을 위해서 있는 것이고 비움은 가득함을 위해서 있는 것이니 따지고 보면 가득함과 비움은 형제나 마찬가지다.

빛과 어둠이 형제인 것처럼.

쓰레기통은 채움과 비움을 되풀이 하면서 산다

사람도 그렇게 비움과 채움을 되풀이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제 맘에 드는 것은 아까워하고 제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신경도 안 쓰기 때문에 쓰레기통처럼 비우기도 어렵고 채우기도 어렵다.

 

산을 오르다 보면 무겁던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꽉 채워진 마음이 저절로 비워지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정상이 가까워지면 다시 채워지기도 하지. 무엇으로 채워졌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거의 대부분 욕심에서 파생된 것들이 아닐까 싶다. 인생에서 정상이라는 곳은 머무는 곳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곳에 오래 머물고 싶어 한다. 그래서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힘든 것이다. 올라갈 때는 마음이 저절로 비워졌을지 모르겠지만 내려갈 때는 스스로 비워야 한다. 만약 떠밀려 내려가거나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

 

실상사2.jpg

실상사

 

언젠가 실상사에서 하룻밤 머문 적이 있었다. 한밤중에 잠이 깨서 밖으로 나왔는데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여있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얀 눈 위에 달빛이 뿌려지고 밤하늘도 맑아 멀리 천왕봉까지 포근하게 보일 정도였다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게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빛도 가득하고 하얀 눈도 가득한데 절은 텅 비어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하얀 눈 위에 달빛이 내려앉아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비움과 가득함이 서로 제 할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었다. 달빛 가득 하얀 눈은 텅 빈 절을 빛나게 하고 텅 빈 절은 달빛에 물든 고요를 빛나게 하고, 이렇듯 비움도 빛나고 가득함도 빛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평화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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