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그리워지면 산으로 간다.
산 아래서 빈껍데기로 살아가는 내 몸뚱이야 풍진 세상에 물들어도 그만이지만 내 안에 나는 그렇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하여 나는 궁리 끝에 산에다가 나를 숨겨 놓기로 하였다. 산에는 흙도 보이고 나무도 많고 꽃도 많으니 오염 되거나 때 묻을 일은 없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가끔 내가 나를 잊어버릴 때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세상 풍파에 내가 많이 닳아서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변해버린 신발 뒤축처럼 말이다.
가끔 내 모습이 낯설게 보일 때 나는 술을 마시곤 한다. 술을 마시면 쪼그라든 내 모습이 부풀어 올라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한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이 빠져나가면 또다시 쪼그라든 모습이 되고 만다.
정말이지 원치도 않은 내 모습을 보노라면 속상할 때가 많다. 그럴 때 나는 충전소로 간다. 내가 즐겨 찾는 충전소는 산이다. 산에 가면 꽃과 나무에도 내가 있고 싱그러운 바람과 흙내 속에도 내가 있으니 산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빈껍데기 속에 내가 다시 채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낮은 산에 가서 충전하면 하루 이틀 정도 버틸 수 있고 높은 산에 가서 충전하면 한두 달 정도 버틸 수 있다. 그렇다고 높은 산이 낮은 산보다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갈 수만 있다면 아무 산이라도 좋다. 나는 주로 우리 동네에 있는 낮은 산에 간다.
동네 산은 날마다 충전할 수 있고 날마다 나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나’라는 놈이 걱정이다.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하니 거친 바람에 상처를 입을 게 뻔하다. 어떤 때는 그 ‘나’가 바람에 날려 가지나 말았으면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설령 그 ‘나’가 세상 풍파에 물든다 해도 내가 데리고 있는 것이 낫지 바람에 날려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나는 평생 빈껍데기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루는 산에 숨겨 놓았던 ‘나’가 산 아래 사는 나를 찾아왔다. 나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내려온 거야?”
나는 산에서 내려온 ‘나’를 반기기는커녕 빨리 돌아가라고 다그쳤다. ‘나’는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쳤다. 빈껍데기로 살아가는 내가 불안해서 찾아온 건데 나는 오히려 산에서 내려온 ‘나’가 세상 풍파에 오염이라도 될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서는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사히 산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그런데 뭔가 마음이 찝찝했다. 꼭 그렇게 보내야만 했던가? 정녕 ‘나’를 품고 이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는 것인가? 나약한 건 ‘나’가 아니라 바로 나였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과 ‘나’를 격리시키기 위해서 산에 가두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나’를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다.
어찌되었든 나는 ‘나’를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 죄를 갖고 있다. 다음에 산에 가서 ‘나’를 만나면 오해를 풀고 나를 용서해 달라고 해야겠다.
‘나’가 걱정이 되기도 하고 충전할 때도 된 것 같아서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창녕 사는 아우한테서 지리산 가자는 연락이 온 터였다. 그런데 왠지 이번엔 충전이 잘 될 것 같지 않았다. 나를 찾아온 ‘나’를 야단치듯 돌려보냈으니 말이다. 제발 삐치지 말고 오해나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우와 나는 어둠이 내려오고 나서야 피아골 산장에 도착했다. 배낭을 풀고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데 어디서 요란한 경상도 말투가 들려왔다. 이윽고 산악회로 보이는 사람들이 도착하여 판을 벌렸다. 술병이 보이고 고기와 생선 굽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산장 주인이 나와서 뭐라고 하는 것 같더니만 어느새 그들과 합세하여 술을 나누고 있었다.
미안했던지 조용히 쉬고 있는 우리에게도 고기와 생선구이가 날아왔다. 고요를 깨는 건 시끄러움뿐만이 아니었다. 생선 냄새, 고기 냄새도 고요를 망가트리고 있었다. 산장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은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지리산 피아골 산장
판이 끝나고 모두 잠자리에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지금쯤 ‘나’가 내 속으로 들어와 줘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저만치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예상한 대로 나를 원망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내 몸을 학대하고 있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테니까. 결국 밤새 한잠도 못 자고 산을 올랐다. 머리가 휭휭 돌고 속이 울렁거렸다. 이 상태로 산행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능선에 올라서자마자 토하고 말았다. 배낭을 벗고 다시 토하자 아우가 등을 두드려 주면서 투덜댔다. 밤새도록 술 마신 내가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하늘이 무서운 얼굴을 하더니 후드득후드득 비를 뿌렸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굵은 비였다. 새끼손가락만한 빗줄기가 내 머리를 사정없이 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