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답게 물든 산이었는데 어느 새 마른 잎들이 흩날리는 계절이 되었다.
제 할 일을 다 마치고 유유히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보니 내 자신이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 들어 내가 한 일이 무엇인가?’
계곡을 건너려는데 잎사귀 하나가 내 얼굴을 스치며 물에 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흩날리는 나뭇잎들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운 이별을 할 수 있는지 경이롭기까지 하였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데 이 많은 낙엽 가운데 하나를 못 잡으랴.
하지만 그 하나를 잡지 못하고 그만 계곡물에 발을 적시고 말았다.
여러 종류의 나뭇잎들이 물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무 가지에 붙어있을 때는 무슨 나뭇잎이라는 걸 쉬이 알 수 있었는데 이렇게 낙엽이 되어 여러 잎들과 섞여 있으니까 무슨 나뭇잎인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나뭇잎들은 대체로 두 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체념한 듯 물결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나뭇잎들과 흘러가기 싫어서 물가를 맴도는 나뭇잎들이 그랬다. 어떤 나뭇잎은 머무를까, 흘러갈까를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밀려오는 물결에 마지못해서 흘러가기도 했다.
갑자기 내 모습이 생각났다. 나도 저 나뭇잎처럼 마지못해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휘청거리는 내 그림자는 꿈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도대체 나는 어쩌다가 꿈을 잃어버린 걸까?
'저건 상수리나무 잎이네.'
나는 흘러가는 상수리나무 잎 하나를 집어 들고 그 위에다 어린 날의 꿈 하나를 실어 조심스레 물 위에 띄웠다.
동네 어른들은 나만 보면 장군이 되라고 부추겼지. 장군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그렇게 날마다 조금씩 장군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이순신 장군을 알게 되었는데 나는 도저히 장군이 될 자신이 없었다.
나의 상수리나무 잎은 얼마가지 못해서 물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꿈이 너무 무거워서 그랬을 것이다.
'저건 함박꽃나무 잎이군.'
나는 물가에 있던 함박꽃나무 잎을 집어 들고 학창 시절의 꿈 하나를 실었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일이다. 클라리넷을 불고 싶었던 나는 밴드 반을 찾아가 클라리넷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담당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이어서 쉽게 허락해 줄 줄 알았다. 그런데 선생님 하는 말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공부도 못하는 놈이 뭘 하겠다고?"
마음속에 돋아난 꿈을 보호해주지는 못할망정 성적이라는 괴물을 내세워 꿈을 말려 죽이는 교육풍토가 나는 미웠다.
내 말은 시험을 없애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 놈의 괴물 때문에 꿈을 피우지 못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함박꽃나무 잎은 그렇게 흐르지도 못하고 가라앉았다.
'아, 저 귀여운 단풍잎!'
단풍잎 하나가 돌에 붙어서 흘러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그 단풍잎을 집어 들고 마음 깊숙이 숨어 있던 꿈 하나를 올려놓고는 조심스레 띄워 보냈다.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던 꿈이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려면 교사 자격증이 있어야 했다.
잘 흘러가던 단풍잎은 폭이 좁고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에 이르자 갑자기 맴돌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바람이 휙 불더니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마른 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여러 종류의 잎들이 물 위에서 잠깐 머뭇거리더니 물살이 빠른 쪽으로 흘러갔다. 나뭇잎들은 먼저 앞서가려고 서로 몸을 부딪치며 싸움을 했다.
나뭇잎들도 사람들 하고 똑같았다.
도대체 앞서갈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쓸데없는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는 서로 푸르렀던 잎들이 아니었던가?
대부분 잎들은 여울목에서 길을 잃었다. 어떤 잎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어떤 잎은 물기슭으로 밀려나고 어떤 잎은 용케 빠른 물살을 타고 빠져나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꿈이 제대로 흘러가길 바란다. 하지만 자기 뜻과 상관없이 엉뚱한 곳에 머물 때도 있다. 물기슭으로 밀려난 잎이 그렇고 물속으로 가라앉은 잎도 그렇다. 아무리 평화롭게 흘러가는 잎이라 할지라도 큰비를 만나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래도 꿈은 꼭 움켜잡고 있어야 한다. 꿈을 놓치는 순간 껍데기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내 단풍잎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여러 종류의 잎들뿐만 아니라 비슷하게 생긴 단풍잎들까지 섞여 있어서 찾기가 어려웠다.
잠간 한눈파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 내 단풍잎! 어디로 갔을까? 잘 흘러가고 있었는데…
한영애-여울목: https://www.youtube.com/watch?v=3jegWjx07SU
여울목
맑은 시냇물 따라
꿈과 흘러가다가
어느 날 거센 물결이
굽이치는 여울목에서
나는 맴돌다 꿈과 헤어져
험하고 먼 길을 흘러서 간다
덧없는 세월 속에서
거친 파도 만나면
눈물겹도록
지난날의 꿈이 그리워
은빛 찬란한 물결 헤치고
나는 외로이 꿈을 찾는다
-「여울목」,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