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잔이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가니 유리가 반겼다.
“카잔 님,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그녀의 얼굴은 환했고 입가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그럼, 나는 잘 지냈어요.”
“글쎄 마나헴이 하루 늦게 떠나는 바람에 오늘 왔어요.
누보 씨도별일 없지요?”
“음, 곧 어머니와 같이 아침 먹으러 내려올 거예요.”
“어머, 아직 아침을 안 드셨군요. 저는 벌써 먹었는데….
누보 씨가 잠꾸러기지요? 호호.”
“음... 아침에 어디 좀 다녀올 데가 있어서….”
“아, 그러셨군요.”
유리는 그제야 카잔의 안색이 평소와 다르게 어두운 것을 느꼈다.
누보가 식당에 어머니와 같이 들어왔다.
당연히 같은 좌석으로 올 줄 알았는데 저만치 따로 앉으며 손을 살짝 들어 아는 척을 할 뿐이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유리의 귀에 들린 말은 더욱 놀라웠다.
“얼마 전에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나발이 붙잡혀 갔어요.”
카잔의 설명을 들은 유리는 저절로 긴 한숨이 나왔다.
그동안 그렇게 애써서 했던 모든 일은 나발과의 장래를 위해서였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엇보다 내일은 집을 나와야 한다.
경호원 오반이 눈치 못 채게 짐도 대충 다 싸 놓았다.
몸의 중심이 뻥 뚫린 것 같았으나 정신을 차리고 카잔에게 물어봤다.
“며칠 전에 우리 어머니 만나셨지요?”
돈 이야기를 들었느냐는 질문이었다.
“응, 그때도 그렇게 안 오셨으면 큰일 날 뻔했었지. 그런데…”
“그런데 또 무슨 문제가 있나요?”
카잔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보가 가지고 온 은전을 도둑맞았어요.”
완전히 설상가상이었다.
사람과 돈이 모두 날개를 달고 동시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럼 어떡하지요?”
유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침 식사가 나왔지만 카잔도 얼른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일단 이사는 계획대로 해야 할 텐데….”
유리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래야지. 너무 낙심 말아요.
우리도 조금 전에 은전 상자가 비어 있는 것을 알았는데, 지금 누보도 제 정신이 아니겠지요.
아침 먹고 같이 잘 상의해 보면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무슨 방법이 있겠지요.”
“네... 저는 그럼 어머니에게 가서 이런 말씀을 드리고 나중에라도 또 올게요.”
“음, 그래야겠지. 잠깐만 기다려요. 누보에게 그렇게 알려주는 게 좋겠네.”
누보의 어머니는 기분이 몹시 좋았다.
저쪽 테이블에 앉은 여자가 누보의 여자친구 같은데 언뜻 보니 얼굴이 이쁘고 복스러웠다.
이 녀석이 어머니 모르게 괜찮은 며느릿감을 벌써 만들고 오늘 넌지시 보여주는 것이다.
“저쪽에 카잔 님과 앉아 있는 여자가 누구니?”
“네.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그래? 아까 너를 보고 굉장히 반가워하던데?”
누보가 아무 대답 없이 빵을 집어 먹자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그 여자 쪽을 다시 보았다.
이상하게 여자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며느리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카잔이 누보의 자리로 건너와 앉았다.
“어머니,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네. 저는 아주 잘 먹었는데 카잔 님은 별로 안 드시는 것 같네요.”
“아, 제가 아침을 잘 안 먹어요.”
카잔이 꾸역꾸역 빵을 입에 넣고 있는 누보에게 말했다.
“내가 얘기 다 했어.
일단 가서 어머니와 상의한 후에 다시 온다고 하네.”
“네... 알았어요. 그렇게 하라고 하세요.”
누보의 힘없는 목소리에 이 애들이 사랑싸움을 한다고 어머니는 생각했다.
그녀는 마지막 빵 한 덩어리를 맛있게 먹었다.
80살도 넘어 보이는 노인은 갈라지고 쇳소리나는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었다.
“예언은 이제 이루어지고, 세상의 종말은 우리 눈앞에 닥쳤습니다.
유대 사막과 요단강에서는 메시아가 오신다는 기쁜 소식이 울려 퍼집니다.
공중의 새도 들의 백합도 바위 틈의 도마뱀도 모두 그를 기다리는데, 불쌍한 예루살렘만 잠을 자고 있습니다.
나는 오래 살았고 눈은 한쪽만 보이고 이빨은 몇 개 안 남았으며 무릎은 흔들립니다.
하지만 볼 눈 있는 사람은 내 마음 속 기쁨이 보일 겁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이제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거예요.
보세요.
감람산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우리의 내부에는 분노와 수치로 더 이상 이대로는 못 살겠다는 외침이 들립니다.
나는 기쁨이 넘칩니다.
내가 아프고 내 숨이 할딱거릴수록 나는 더 기쁩니다.
하나님이 내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어요.
‘너는 메시아를 네 눈으로 볼 수 있으리라’
따라서 내게 죽음이 가까이 올수록 우리의 메시아도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나는 40년 전에 이방인 헤롯 대왕을 치료하는 광경을 옆에서 봤습니다.
그의 썩어 가는 살과, 벌레가 가득한 피와, 구더기가 나오는 배꼽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땅을 야만인이 밟았으니 그때부터 세상의 종말은 시작된 겁니다.
이제 점점 그 끝이 보입니다.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릅니다.
왜요?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세요 여러분, 이제 곧 노예 생활도 끝나고 로마인도 물러갑니다.
메시아가 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분이 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승리의 전쟁이니 남자들은 싸울 준비를 하세요.
칼과 창을 준비하세요.
여자들은 등잔의 기름을 준비하세요.
언제 신랑 되신 메시아가 올지 모릅니다.
잠을 자다가도 소리가 들리면 깨어나야 합니다.
오늘 밤이 될지 내일 밤이 될지 아무도 몰라요.
감람산에서 들리는 작은 돌멩이 구르는 소리에도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는 어젯밤에도 메시아를 보고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깨어보니 꿈이었어요.
아직 내가 죽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거예요.”
노인의 움푹 들어간 뺨은 쉴새 없이 움직였고 지팡이를 짚은 손은 떨렸다.
로벤은 감람산에서 메시아가 곧 내려온다면 오늘 밤부터 주위를 잘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몇 걸음 걷기 전에 성전 경비대원 서너 명이 달려왔고, 사람들을 헤치고 노인을 반짝 들어서 들것에 실었다.
익숙한 모습으로 보아 오늘 처음 있는 일이 아닌 듯했다.
만약 노인이 잡혀가서 수명이 단축된다면 메시아도 빨리 올 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