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보가 한숨 잘 자고 일어났는데도 어머니가 아직 안 오셨다.
카잔을 만나러 나갈 시간이다.
탁자 위에, 며칠 전 주머니에 넣은 은전 세 개 중 제일 반짝이는 것을 하나 꺼내 올려놓았다.
어머니가 와서 보시고 무척 좋아하실 것이다.
은전 앞면에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지난번 유리와 같이 만났던 갈릴리 호수 식당에 들어가니 카잔이 미리 와 기다리고 있었다.
갈릴리 호수
“오늘은 혼자 나왔나?”
“네, 그렇습니다.”
“같이 나오지 그랬어. 무슨 일이 있나?”
그의 말을 들으니 유리가 더 걱정이 되었지만, 내색을 않고 대답했다.
“아니요. 오늘은 제가 좀 따로 드릴 말씀도 있고 해서요.”
“아, 그래? 무슨 심각한 얘기인가 보네.”
식사하면서도 얼굴이 굳어 있는 누보를 보고 카잔도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포도주는 말씀 좀 나누고 한잔하시지요.”
음식을 얼추 다 먹은 누보가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카잔 형님께 먼저 사죄를 드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나 하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카잔에게 누보가 뭔가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검은 나무에 글씨가 새겨진 목찰 같았다.
카잔이 받아서 보니 누보가 열성당원이라는 신분증이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누보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사실은 제가 열성당 비밀 사업부 요원입니다. 카잔 형님.
여기 취업한 것도 모종의 임무를 띠고 위장 취업한 거지요.”
카잔의 눈이 커졌고, 누보가 열성당 요원이라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검은 표찰을 주머니에 넣은 누보가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실은 유리와도 부부가 아닙니다.”
카잔이 고개를 끄떡이며 이제 이해가 된다는 듯이 물었다.
“아, 그랬구나. 어쩐지…
열성당이라면 유대인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는 그 열성당을 말하는 건가?”
“네, 바로 그렇습니다.”
누보가 턱을 뒤로 당기며 대답했다.
“음, 열성당에서 빌라도 총독의 막사에 무슨 할 일이 있을까?
설마 로마 군인들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아닐 테고.”
“아닙니다. 그건 무리지요. 하하.”
누보는 독수리 깃발을 탈취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는 것과 오늘 일을 마쳤으니 내일부터는 안 나오고 카잔도 몸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했다.
그의 말을 끝까지 들은 카잔은 ‘음’하는 신음을 한번 내더니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동안 유리가 말한 내 별자리에 대한 것도 사실이 아닌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유리가 본 대로 얘기한 겁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지금 자네는 큰 모험을 하고 있네.
만약 내가 자네를 신고하거나 지금이라도 붙잡아 간다면 어떻게 하려고 하나?”
카잔이 누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콧수염이 살짝 흔들렸다.
“사실 저도 처음에는 깃발을 없앤 뒤에 그냥 사라져 버릴까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그동안 형님을 몇 번 만나면서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리도 반대했고요.
지금 카잔 형님 말씀대로 저를 잡으신다면 그러실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이미 깃발은 없어졌고 카잔 형님도 책임을 면하긴 어려울 겁니다.”
짧은 침묵이 흐른 후 누보가 말을 이었다.
“제가 카잔 형님께 모든 말씀을 드리고 우선 용서를 구하는 겁니다.
그리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반년 치 봉급을 제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길게 한숨을 쉬고 카잔이 입을 열었다.
“유리가 본 별자리 운세가 잘 맞는 것 같군.
이제 나도 여기를 떠날 때가 정말 되었나 봐.”
카잔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붉어지는 수평선을 응시하며 계속 말했다.
“누보 아우가 나에게 자세한 얘기를 해줘서 고마워.
경제적인 문제까지 생각해줘서 더욱 고마운데 그건 안 줘도 되네.
나는 사실 앞으로 길어야 반년 정도 더 이 일을 하고 고향으로 가서 조용히 농사나 지으며 살려고 했었어.
그래서 유리가 참 용하다고 생각했지. 하하.”
“고향이라면 사마리아로 가시려고요?”
“응, 그래야지. 이제 나이도 있고, 고향에서 할 일도 좀 있고...”
“여하튼 제가 말씀드린 것은 드려야 제가 덜 죄송하겠습니다.
나중에 드릴 테니 이해해 주시고 받아주세요. 카잔 형님”
“하하, 자네 뜻이 정 그렇다면 그러지.
그럼 그 전에 더 급한 것부터 하고.”
누보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이제부터 포도주를 마셔야지. 하하.”
카잔이 밝게 웃으며 포도주를 시켰다.
누보도 따라 웃으며 카잔에게 말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이 이렇게 이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마리아로 가시더라도 가끔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음, 그러면 좋지. 그런데 열성당 일을 하다 보면 위험한 일도 많지 않은가?’
“그럼요. 우리 민족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어디 쉽게 되겠어요?
피와 땀을 흘려야지요. 지금도 우리 열성당 당수는 얼마 전 체포되어 감옥에 계세요.
이번에 제가 한 일이 그분의 석방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누보는 자신의 얼굴이 석양에 물들어 멋지게 보일 거라 생각했다.
“아, 그렇구나. 독수리 깃발이 없어진 걸 알면 빌라도가 난리가 날 거야.
그 깃발은 황제가 빌라도를 여기 파견하면서 직접 준 건데, 몇 년 전에 예루살렘에 가지고 들어가 성전에 꽂아 놓으려다 큰 사달이 났었지.”
“네, 저도 들었어요. 유대인 몇천 명이 모여들어 항의하는 바람에 빌라도가 기겁을 하고 도로 철수시켰지요.”
“그래, 그런 상징성이 있어서 그걸 찾지 못하면 아무리 빌라도라도 목이 간당간당할 거야.
그 큰 깃발을 안 들키고 가지고 나오기 어려웠을 텐데?”
“네, 그래서 그 근처에 숨겨 놓았어요. 나중에 우리 요구를 들어주면 어디 있는지 알려 주면 되니까요.”
“그랬구나. 자네 머리가 그렇게 좋은지 몰랐어.
자, 이제 포도주 한잔 마실까?”
카잔이 누보의 잔에 먼저 한 잔 가득 따르고 자기 잔에 따르려 하자, 누보가 얼른 병을 빼앗아 카잔의 잔에다 검붉은 포도주를 잔뜩 따랐다.
“자, 앞으로 새로운 십 년을 위해 건배!”
카잔이 잔을 들어 누보의 잔과 부딪친 후 눈을 감고 꿀꺽꿀꺽 한입에 다 마셨다.
누보도 긴장이 풀리며 이제 모든 일이 다 마무리된 듯싶었다.
“음, 그럼 자네를 이제 언제 보나?
유리도 떠나기 전에 한번 보고 싶네.”
누보는 사흘 후 광장호텔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별자리 점은 유리의 엄마가 더 잘 보니까, 사마리아 가기 전에 유리의 집에 꼭 가 보라고 주소를 알려줬다.
포도주 한 병이 금방 없어졌지만, 오늘은 그만 일어나고 다음에 만나서 또 마시기로 했다.
갈릴리 호수에는 어느새 태양이 넘어가며 하늘과 물을 황금색으로 어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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