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추억의 흑진주, 루브리아에게~
그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신지?
나는 모든 일이 권태롭던 중, 세야누스가 처형되어 조금 덜 심심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오.
황제 폐하를 대리해서 모든 권력을 휘두르던 세야누스가 그렇게 될 줄은 그도 몰랐고, 나도 몰랐고, 카프리 섬에서 은둔하고 계시던 황제께서도 모르셨을 거요.
폐하께서 연세가 있으시니 다음 후계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데, 그 자리는 매우 뜨겁고 미끄러운 자리라 나는 별 관심이 없다오.
로마에 며칠 전 첫눈이 내렸소.
오래전 게르만 전투에서 눈발이 펄펄 날리던 군영 막사를 그대와 뛰어다니던 때가 생각나오.
그대의 아버지 로무스 장군도 이제 50이 넘으셨겠구려. 안부 전해 주시오.
그곳은 내가 가 본 적은 없지만, 눈은 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모르겠소.
내 위치에 있다 보니 무슨 말이던,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이 갈 때가 많구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옷자락 속에 단검을 숨기고 시저 장군님을 찔렀듯, 내 주위에도 누가 단검을 가슴에 품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오.
오랜만에 쓰는 편지에 걱정되는 말을 해서 미안하오.
나는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술을 한잔하는 시간이 제일 편하다오.
로마에 올 일이 있으면 꼭 연락주기 바라오.>
그대의 오랜 친구 - 칼리굴라
칼리굴라의 서명 옆에는 그의 반지 인장이 크게 찍혀 있었다.
루브리아는 파피루스 서신을 가지고 아빠의 집무실로 가서 보여드렸다.
“아, 칼리굴라 님이 내 안부도 물으시고 감사하네.
그분이 대여섯 살 때 큰 군화를 신고 뛰어다니시던 생각이 나는데 세월이 정말 쏜살같구나.”
“네, 아버지. 저하고 뛰어놀던 장난꾸러기 꼬마가 황제가 되면 이상할 것 같아요. 호호.”
“이 편지로 봐서는 그가 황제가 될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진 것 같다.”
“어머,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세야누스 실각 후 그분 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그럼에도 본인이 마음을 비운다면, 지금 황제께서는 그런 사람을 좋아하시지.”
“말씀을 들어보니 그럴 것도 같네요. 로마에 가게 되면 한번 찾아가서 인사를 드려야겠어요. 답장도 곧 보내고요.”
“그래야지. 여하튼 우리는 유월절만 지나면 로마로 돌아가야 한다.
네 눈이 그 전에 나으면 좋겠지만, 혹시 아니면 로마에서 치료를 빨리 해야하니까.”
“네, 그래야지요.”
루브리아가 건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네가 만난다는 예수라는 랍비에 대해 좀 알아봤는데, 이 사람 주위에 불순분자들이 많이 따라다니는 것 같다.
아무래도 경호원 없이는 위험하겠다.
네 주위에서 떨어져서 다른 사람들은 눈치 못 채게 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라.”
평소에는 루브리아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주는 아버지지만, 그녀의 안전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루브리아는 그냥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런데 예수라는 분이 그렇게 위험한 사람인가요?”
“그 사람의 주장은 그들의 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아, 그게 무슨 뜻인가요?”
“지금 여기서 잘 살고 명망 있는 사람과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는 건데, 결국 혁명을 하겠다는 거 아니겠니?”
“네, 그런 면에서는 상당히 과격하네요.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폭력적인 방법보다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음,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다 같지는 않을 거다.
여하튼 유월절 전에 가서 만나고 속히 돌아오도록 해라.
그 사람을 이번에 체포하려고 산헤드린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는 거 같더라.
자칫 잘못해서 그런데 말리면 안 되니까 조심해야 한다.”
“네, 그럼요. 걱정 마세요.”
루브라이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이번에 바라바와 같이 예루살렘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총독의 집무실에서 누보는 바삐 움직였다.
드디어 오늘 아침, 강단 아래 공간에 깃발을 넣을 수 있는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그냥 봐서는 잘 안 보이는 미닫이식 작은 입구인데, 이것을 만들면서 언뜻 스친 생각이 있었다.
총독의 집무실에도 이런 공간이 있다면 벽과 바닥을 두드려봐서 속이 빈 소리가 나는 곳에 금고가 있을 것 같았다.
내일이면 총독이 돌아올 텐데 그 후에는 경호가 강화되어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다.
누보는 마치 옆방에 있는 사람에게 노크를 하듯이 한 발자국 간격으로 벽을 두드려 봤다.
빈 소리가 나는 곳은 발견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바닥을 꼼꼼히 두드려 보고 살펴봤는데 실망스럽게도 그런 곳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 바닥 청소는 저절로 깨끗이 되었다.
찾는 것을 포기하고 집무실 문을 닫고 나오려는 순간, 맞은편에 걸려 있는 빌라도 총독의 얼굴과 마주쳤다.
로마에서부터 가져온 그의 대형 초상화였다.
누보는 다시 들어가 그림을 조심스레 내리고 그 자리를 두들겨 보았다.
‘텅텅’ 속이 빈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