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가 무르익어 가며 헤로디아 왕비의 양 볼이 연한 적포도주 색깔을 띠었다.
흑진주 목걸이를 한 루브리아의 하얗고 조각 같은 목도 포도주 몇 잔에 약간 붉은 색이 되었다.
음악이 계속 흐르고 각 테이블에서 웃고 마시며 떠드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모인 사람들이 50여 명은 되는 것 같았다.
기름지고 연한 양고기 구운 냄새가 연회장에 가득 찼다.
얼굴이 까만 시종들이 연신 음식을 나르는데 왕비가 은 스푼으로 빈 물잔을 두드렸다.
<띵띵> 유리가 울리는 소리가 나니 사람들이 대화를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오늘 특별히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귀한 손님 몇 분을 소개해 드릴게요.
먼저 총독 각하의 제 2부속실장, 칼로스 천부장 님이 오셨습니다.”
칼로스가 일어나서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박수 소리가 났다.
“다음은 로무스 근위대장의 따님이신 루브리아 양입니다.”
루브리아가 일어나서 인사를 했고 박수 소리가 더 크게 났다.
“루브리아 양은 로마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재원으로, 유대에 와서도 우리의 신앙과 역사를 공부하고 있어요.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대단한 미인인데 리코더 연주도 잘 합니다.
마침 이 자리에 리코더가 있으니 그녀에게 한 곡을 부탁하려고 하는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사람들의 박수가 터졌고 어떤 사람은 유리컵에 스푼을 쨍쨍 두드리며 환호했다.
루브리아가 테이블 사이로 걸어 나가 악사가 건네주는 리코더를 받아 잡았다.
“존경하는 왕비님의 건강하심과 이 땅의 평화를 기원합니다.”
그녀가 곧 리코더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부드러운 통나무의 저음 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울리기 시작했다.
루브리아가 연주하는 곡은 언젠가 그녀가 바라바에게 들려준 곡이었다.
맑고 그윽한 소리가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흘러나와 천천히 춤을 추었다.
루트를 뜯는 악사가 조용히 그 곡에 맞추어 반주를 집어넣으니 소박한 2중주가 되었다.
순백색의 부드러운 옷을 걸치고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연주를 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음악의 여신이 잠시 이 땅에 와서 파티에 참석한 듯싶었다.
소리가 높아지며 멜로디가 빠르게 전개되었으나 한 음 한 음이 사람들의 마음을 헤집고 다녔다.
음식을 먹던 사람들도 식사를 중단하고 시중들던 시녀들도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후 그녀의 리코더 소리는 점점 느려지며 평안한 기도가 되었다.
누군가를 위한 간절한 기도,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순종의 기도인 듯 싶었다.
루브리아가 입술에서 리코더를 조용히 내렸다.
잠시 정적의 순간이 지나고 헤로디아가 크게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뒷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박수를 치며 앙콜을 외쳤다.
그중 한사람이 수염을 기르고 이집트 두건을 쓰고 있었다.
물론 바라바는 아니었으나 루브리아는 그가 어디선가 이 음악과 기도를 듣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앙콜을 사양하고 루브리아는 자리로 돌아왔다.
“정말 멋진 연주였어. 곡목이 뭔가?”
헤로디아가 손뼉 치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은혜받은 영혼의 춤’이라는 곡이에요.”
“곡도 좋지만 연주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살짝 질투가 났어. 호호.”
왕비가 눈길을 맞은 편에 앉은 칼로스 천부장에게 돌렸다.
“천부장께 어려운 질문 하나 할게요.”
칼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제 잔 한 잔 받으세요.”
헤로디아가 루비색 포도주를 잔에 가득 담아 칼로스에게 건네주었다.
“영광입니다. 왕비님.”
조각 같은 그의 얼굴은 술 한잔을 단숨에 다 마셔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천부장께서 보시기에 프로클라 여사와 헤로디아 왕비 중 누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시나요?”
왕비의 도발적인 질문에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눈길이 모두 칼로스의 입술에 꽂혔다.
“죄송하지만 저도 왕비님께 술 한 잔 드린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여유 있게 한 잔을 따라 주었고 헤로디아도 단숨에 마셔 버렸다.
“자, 이제 빨리 대답해보세요.”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붉은 포도주를 마실 때는 유대 땅에서 왕비님이 가장 아름다우십니다.”
묘한 말이었다. 헤로디아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보통 때는 프로클라 여사가 더 아름답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여사님은 하얀 포도주를 마실 때 아름다우십니다.”
“칼로스 천부장에게 못 당하겠네요. 호호. 칭찬으로 듣겠어요.”
식사가 거의 끝나자 디저트가 나오기 시작했다.
단 빵 위에 사이프러스 열매가 얹혀있는 디저트와 로마에서 가져온 오색 사탕도 그릇에 담겨 나왔다.
요나단 제사장이 옆에 앉은 루브리아에게 디저트를 권하며 말했다.
“아가씨는 로마에서 역사 공부를 하시고 유대 종교에도 관심이 많으시다고 들었는데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제사장님께 드릴 말씀이지요.
저는 이제 곧 아버지를 따라서 로마로 돌아갈 거예요.
로마에 오시는 일이 있으시면 연락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옆 테이블에서 젊은 사람 두 사람이 왕비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왕비님, 이렇게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니고데모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니고데모 님, 와 주셔서 고마워요.
가말리엘 선생님도 오셨나요? 오셨으면 이 자리로 모셨어야 하는데….”
“선생님은 못 오시고 대신 선생님의 수제자 한 분이 오셨어요.”
니고데모의 옆에 서 있는 키가 좀 작고 머리가 큰 남자가 인사를 했다.
“사울이라고 합니다. 만나 뵈어서 영광입니다.”
“아, 그러세요. 반가워요.”
왕비가 가볍게 대꾸했고 두 사람은 요나단과 눈인사를 나눈 후 자리로 돌아갔다.
디저트 접시가 다 비어가자 칼로스 천부장이 일어나 헤로디아에게 와서 말했다.
“왕비님, 제가 오늘 저녁에 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먼저 일어나야겠습니다.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괜찮아요. 그 대신 다음에 붉은 포도주 많이 마셔야 해요. 호호.”
“네, 알겠습니다. ”
몸을 일으키는 칼로스에게 왕비가 생각난 듯 물었다.
“아, 총독 각하도 안 오셨는데 왜 여기 먼저 오셨나요?”
그가 주위를 돌아본 후 작은 목소리로 왕비에게 말했다.
“바라바라는 열성당원을 잡으러 왔습니다.”
루브리아의 귀에는 그 소리가 크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