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칸의 방에 들어오면서 품 안에 단도를 반쯤 꺼낸 카잔이, 생각과 다른 광경을 보고 멈칫했다.
방구석에 누워 있는 아칸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보,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손에 밧줄을 잡고 여차하면 여자를 묶으려던 유리도 동작을 멈추었다.
“어디 아파요?”
누보가 얼떨결에 물었다.
아칸이 힘들게 일어나 벽에 기대어 앉는데 얼굴이 상처투성이였다.
눈은 한쪽이 부어서 잘 안 떠지고 입술이 터져 피가 엉겨 있었다.
“당신이 설명 좀…”
아칸이 마누라에게 부르튼 입술로 말했다.
갑자기 사람들이 들이닥쳐 썰렁한 분위기에, 기어 다니던 아이 한 명이 울기 시작했다.
아이를 안고 달래며 그녀가 말했다.
“며칠 전 세 사람이 찾아와 누보 씨의 집을 알려 달라고 해서 저 사람이 앞집이라고 가르쳐 주었다는군요.
그런데 그날 오후에 그중에 두 사람이 다시 와서 누보 씨가 어디로 사라졌는데, 숨을 만한 곳을 대라고 해서 모른다고 했더니 다짜고짜 때리기 시작했어요.
저이는 진짜 모르고, 알아도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 같아서 말하기 싫었다네요.
그렇게 한참을 맞아도 말을 안 하니까, 다음에 올 테니 누보 보면 알려 달라고 하고 가 버렸어요.”
그녀의 말에 누보가 할 말을 잃었고 유리가 물었다.
“그 두 사람 중 덩치가 엄청나게 큰 사람이 그랬지요?”
“네, 맞아요. 한쪽 눈에 안대를 했고요, 다른 사람은 옆에 서 있기만 했어요.”
마나헴이 누보를 놓친 후 우르소와 오반을 보낸 것이다.
밧줄로 묶기는커녕 치료비를 줘야 할 판이다.
“근데 왜 처음에 문을 안 열려고 했어요?”
누보가 여자에게 물었다.
“저이가 누보 씨를 보면 나중에 그 사람들이 와서 물을 때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안 만나는 게 좋을 성싶어서 내가 그랬어요.”
누보는 허탈해서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누보 씨도 알겠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데 벌써 삼사일째 누워 있으니 큰일이에요.”
“그런 말은 하지 마!”
아칸이 마누라에게 핀잔을 준 후 자리에 다시 누웠다.
아무 말 없던 카잔이 입을 열었다.
“듣고 보니 미안하게 되었네요.
이걸로 약이라도 사서 드세요.”
카잔이 내미는 은전 한 개를 그녀가 조금 사양하다 받아 넣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방을 잠깐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누보 씨 친척이세요?”
“네, 그래요.”
누보가 얼른 대답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카잔이 방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은전을 숨길 만한 곳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근데 앞집에 이상한 사람들이 몇 명 계속 있는 것 같던데 나갈 때 조심하세요.
그들의 눈에 띄어서 또 우리에게 물으러 오지 않게요.”
“네, 그럼요. 혹시 묻더라도 저는 못 봤다고 해 주세요.”
“당연하지요. 봤다고 하면 그후 대책이 없잖아요.”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빨리 쾌유하시기 바랍니다. 미안합니다.”
집 문을 나서는 그들에게 조금 큰아이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카잔이 아칸의 뒷마당 쪽에 무언가를 묻은 흔적이 있는지 둘러보았으나 아이들이 놀던 자국밖에 없었다.
땅을 보며 한숨을 쉬고 있는 누보를 유리가 위로했다.
“너무 낙심 말아요. 곧 진짜 범인을 알 수 있겠지요.”
“그래. 좀 더 잘 생각해 보자. 우리가 분명히 아는 사람일 거야.”
카잔이 유리에게 밧줄을 다시 받았다.
“아무래도 제가 지금 베다니에 다녀오는 게 좋겠어요.
그래야 내일 재판 끝나고 오후에 바로 가실 수 있지요.”
유타나가 루브리아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어제 못 만난 사람을 만나고 가도 되지 않을까?”
“혹시 오늘도 안 오면 안 되니까요.
갔다 오는 데 두 시간이면 충분하니까 얼른 다녀올게요.”
“응, 그래.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
유타나가 방을 나가자 앞방에서 맥슨 백부장이 나오며 그녀에게 말했다.
“어디 나가시는 건가요?”
“네, 베다니에 잠깐 다녀올게요.”
“아, 네. 우리가 경호를 안 해도 되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금방 올게요.”
“내일 베다니에 가서 예수 선생께 아가씨 눈 치료 받고 늦어도 토요일 날은 돌아가야 합니다.
로무스 대장님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토요일은 돌아오라고 하셨으니까 유타나 씨도 그렇게 알고 있기 바랍니다.”
맥슨이 절도있게 말했다.
“네, 알겠어요. 그래서 지금 저도 베다니에 가는 거예요.”
볼수록 믿음직하고 잘생긴 맥슨에게 방긋 웃으며 로비로 내려갔다.
혹시나 해서 로비를 둘러보니 저쪽 구석에 요한이 어떤 여자와 앉아 있었다.
유타나가 반갑게 다가가니 요한도 그녀를 보았다.
“유타나 님, 어제 죄송했어요.”
요한에게 어제 일을 자세히 들은 유타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요한이 어머니와 함께 바라바 대신 끌려가서 고생하고 나온 것이다.
“그랬군요. 저도 지금 막 베다니로 가려고 했어요.”
“네, 저희가 내일 직접 안내를 해야지요.
그런데 그 전에 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살로메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예수 선생을 위해 변호사를 사는 비용을 언급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아, 그런 문제라면 아가씨가 흔쾌히 도와주실 거예요.
제가 말씀드려 볼게요.”
유타나가 다시 올라가니 루브리아가 눈에 찜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라면 도와줘야지. 그렇게 한다고 전해줘.”
“지난번 만난 요한 님과 그의 어머니가 오셨다면 언니도 한번 만나보세요.
저는 처음 요한 님을 보고 바라바 오빠인 줄 알았어요.” 사라가 말했다.
“아, 그래? 그럼 한번 만나 봐야지. 아래층 식당에서 잠시 기다리시라고 해.”
유타나가 그제야 어제 그들을 못 만난 이유를 설명하며 말했다.
“걱정하실까 봐 나중에 말씀드리려 했어요.”
루브리아와 사라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요한과 살로메는 유타나의 주인이 직접 만나러 내려온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로마에서 온 대단히 높은 사람의 딸이라니 변호사비 정도는 문제없을 것이다.
식당에서 잠시 앉아서 기다리자 그녀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제가 요한이고 이분은 저의 어머니입니다.”
그녀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요한을 바라본 후 자리에 앉았다.
“네, 저는 루브리아라고 합니다. 와주셔서 고마워요.”
“저희가 이렇게 뵙게 되니 영광이지요.
저는 연세가 많으신 분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아름답고 젊은 분이시군요.”
살로메가 감탄하듯 말했다.
“고맙습니다.”
루브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요한님, 오랜만에 봬요. 저 사라인데 기억하시죠?”
“그럼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네, 이번에 우리 루브리아 언니 눈이 꼭 나아야지요.”
“그럼요. 틀림없이 그렇게 되실 거예요.
내일 오후에 예수 선생님 만나도록 해 드릴게요.
우리 요한이 제자 중 가장 사랑받는 제자예요. 호호.”
“아, 그러시군요. 그러니까 선생님을 위해 변호사까지 구해 놨겠지요.
그 변호사가 누군가요?”
“여기 최고의 변호사예요. 가낫세라고요.”
살로메가 자랑스럽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