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중석 뒤에서 바라바의 웃는 모습을 본 루브리아는 세상의 모든 환희를 느꼈다.
꿈결 같은 마음에, 지금 여기가 어딘지 잠시 잊었으나 곧 가야바 재판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사는 피고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인이나 물증이 있으면 지금 말씀해 주세요.
없으면 바로 선고하겠어요.”
짜증 섞인 가야바의 재촉이었다.
“네, 존경하는 재판장님,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이 자리에 나온 피고 측 증인 무단의 동생 아단의 사인입니다.
본 검사는 피고가 그를 죽였다는 자백을 받아냈으나 피고 측은 당시 최면술에 걸려서 한 말임으로 법적 효력이 없고, 아단이 여러 심리적 압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주장의 증거로 아단이 죽기 전 쓴 ‘너무 사는 것이 괴롭습니다’라는 메모를 재판부에 제출했습니다.”
부심 판사가 가야바를 슬쩍 보며 탈레스의 말을 끊었다.
“검사는 다 아는 얘기는 하지 마시고 요점만 말하세요.”
탈레스가 판사의 말에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제 말 아직 안 끝났습니다.
이 재판은 아단이 쓴 ‘너무 사는 것이 괴롭습니다’라는 메모가 피고의 자살을 입증한다는 전제하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이 메모는 아단이 쓴 전체 편지의 일부로서 피고 루고가 전체의 뜻을 왜곡하기 위해 이 부분만 오려낸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피고도 이것을 인정했습니다.
물론 최면술 상태였다며 법적 효력을 부정하겠지요.
그러나 아단이 쓴 편지 원본이 나왔다면 더 이상 진실을 왜곡할 수는 없을 겁니다.”
청중석이 술렁거렸고 가야바가 가낫세 변호사를 쳐다보았다.
작은 목소리로 가낫세가 루고의 귀에 대고 물었다.
“그런 편지가 있었나요?”
“이상하네. 내가 분명히 찢어버렸는데….”
탈레스 선생이 마치 그들의 대화를 옆에서 들은 듯 말했다.
“피고의 가장 큰 실수는 아단이 보낸 그 편지를 무심코 찢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편지는 태워버렸어야지요.
제가 루고 피고인의 집 쓰레기통에서 이 편지를 찾아내어 복원시켰습니다.
이 편지를 읽기 전에 부심 판사께 이에 대한 증거보전신청을 하겠습니다.
지난번 재판에서 피고 측이 제출한 ‘너무 사는 것이 괴롭습니다’라는 메모는 증거로 재판부에서 보관하고 계시지요?”
부심 판사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면 지금부터 편지 원본을 읽겠습니다.
<루고 백부장 님께 지금 제 심정과 상황을 글로 써서 드립니다.
읽어 보시고 내일 백부장 님 생각을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비록 사마리아인이지만 유대교 신자로서 십계명을 준수하고 살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과적으로 ‘살인하지 말라’라는 제6계명을 어겼습니다.>”
여기까지 읽어나가자 청중석이 다시 술렁거렸고 가야바는 비스듬한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탈레스 선생이 루고와 가낫세을 한 번 쳐다본 후 계속 읽어 내려갔다.
“<사무엘 님은 매일 옆에서 귀찮게 감시하는 저에게 한 번도 언짢은 표정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저녁에 생선도 몇 마리 집에서 먹으라고 주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분이 열성당 당수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착한 분이 저 때문에 그렇게 되신 것을 생각하면>”
“다음 부분 찢어져 나갔습니다.
여기 썼던 글이 여러분이 짐작하시는 대로 ‘너무 사는 것이 괴롭습니다’라는 글입니다. 계속 읽겠습니다.”
“<저는 승진도 하고 싶고 또 결혼도 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양심의 형벌을 평생 안고 절대로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몰랐는데 사람이 제6계명을 어기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군요.
사실 백부장 님도 양심의 가책이 있으시겠지만, 그래도 직접하지 않으시고 저를 시키셨으니 아마 제 심정을 잘 이해 못 하실 겁니다.”
이 대목에서 탈레스 선생이 읽기를 멈추고 가야바를 똑바로 올려보았다.
“여기까지로 충분히 피고의 유죄가 소명되었습니다. 시간 관계상 이후는 생략하겠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가낫세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검사가 제시한 편지는 피고가 썼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글씨체가 비슷하다고 해서 억울한 사람들이 누명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맞습니다. 비슷하면 문제가 있지요.
그러나 이 글씨체는 똑같습니다.
재판부에서 가지고 있는 ‘너무 사는 것이 괴롭습니다’라는 메모와 이 편지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탈레스 선생이 읽던 편지를 단 위에 있는 부심 판사에게 건네주었다.
두 글씨를 비교해 본 후 가야바가 말했다.
“나는 필적 감정에 대해 유권 해석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단의 형 무단이 나와서 그의 의견을 알려주기 바랍니다.”
무단이 청중석 뒤에서 걸어 나와 글씨체를 비교해 본 후 작은 소리로 말했다.
“비슷하기는 하나 제 동생 글씨는 아닌 것 같습니다.”
청중석에서 또 술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루브리아와 사라의 얼굴도 굳어졌다.
탈레스 선생이 일어나서 재판부에 무언가를 제출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필적 감정사 자격증입니다.
로마에서 발행한 자격증으로 법정에서 유권 해석을 할 수 있는 1순위입니다.
즉 본인을 제외하고는 법원에서는 필적감정사의 판단에 근거하여 재판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야바가 감정사 자격증을 확인한 후 가낫세 변호사도 보게 하였다.
탈레스가 계속 말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유대민족의 해방자였던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 중 여섯 번째 계명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어긴 아단의 고뇌가 얼마나 심했으면 이같은 서신을 썼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인 무단은 십계명의 9번째 계명을 또 어기고 있습니다.
증인 무단에게 묻습니다. 제9계명이 뭡니까?”
증인석에 서서 대답을 못하는 무단에게 탈레스가 다시 추궁했다.
“증인은 제9계명도 모릅니까?
십계명을 모르면 증인 자격을 박탈당할 수 있어요.”
무단이 변호사를 쳐다보았고 그의 머리가 끄덕이자 입을 열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입니다.”
“증인은 억울하게 죽은 동생이 이웃이 아니라고 거짓 증거 합니까?
동생이 이웃보다 더 가깝지 않습니까?”
무단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의 있습니다. 재판장 님.” 가낫세가 일어나며 말했다.
“지금 검사는 증인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있습니다.
재판과 관련되지 않는 질문은 삼가해 주기 바랍니다.”
가야바 재판장이 옆에 앉은 부심과 한두 마디 속삭인 후 말했다.
“오늘 선고 공판을 내일 오전 11시에 속개합니다.”
루고가 잔뜩 굳은 얼굴로 간수들에게 끌려 들어갔고, 가야바 재판장은 뒤로 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