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장의 말이 계속되었다.
“또 중요한 것은 지금 빌라도 총독의 정책이 전환기에 와있다는 것이오.
당신도 알겠지만 지금 총독 각하가 이 땅에 부임하신 지 6년이 넘었는데, 어떤 때는 초강경 정책으로 무자비한 억압도 해 보았지.
이 방법이 잠시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장기적으로는 유대인들의 더 깊은 반발만 산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소.
유대민족은 다른 어떤 민족과도 정말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거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발이 동감을 표시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중앙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지 율법서를 읽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아까부터 소리가 났는데 나발의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이제 들리는지도 몰랐다.
“특히 프로클라 여사님은 항상 유대인들과 대화를 강조하시지요.
총독 각하도 요즘은 그런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셨는데, 이 방법이 효과가 없으면 언제 다시 강경 기조로 돌아올지는
장담할 수 없소.”
나발이 다시 고개를 끄떡였다.
“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열성당을 없애 버리는 것보다 당수를 우리와 마음이 통하는 사람으로 바꾸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오.”
“아, 네. 그러시군요.”
“이제 내가 왜 당신을 지하 감옥에 집어넣고 고문을 하지 않는지 알겠지요?”
“네, 알겠습니다.” 나발이 얼른 대답했다.
천부장은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후 나발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음, 그래서 아셀 당수를 대신할 인물을 내가 뽑으려 하는데 여기에 두 가지 선행조건이 있소.
우선 그의 관상이 우리 로마제국과 맞아야 하고, 두 번째는 현재 열성당 안에 있는 강경 분자들을 그가 솎아낼 수 있어야 하오.”
나발의 눈이 반짝 빛났다.
“현재 후보자가 두 명 있는데 나발과 또 한 사람은 아몬이란 인물이오.”
천부장은 이미 열성당 내부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나발에게 먼저 그 기회를 주고 싶소.
내가 본 당신의 관상은 놀라울 정도로 우리와 잘 맞고, 장래에는 유대 민족을 평화롭게 이끌어 갈 장군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오.”
“감사합니다.”
나발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역시 장군이란 말이 듣기 좋았다.
“관상으로 먼저 기회를 주었지만, 열성당 내부의 강경파를 제거하지 못하면 당신이 먼저 우리에게 제거될 것이고 우리는 아몬을 만나게 될 것이오.
아리스토텔레스 선생의 관상학 책에도 과거와 미래는 나와 있지만, 현재의 선택은 본인밖에 모른다고 써 있지.”
조각 같은 천부장의 얼굴이 얼음처럼 느껴졌다.
“아, 그런데 현재의 선택이 미래를 좌우하지 않나요?”
“그러니까 사람의 관상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는 거요. 더 좋게 혹은 더 나쁘게.”
“아, 네... 그런데 열성당 내부의 강경파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그야 지금 시위를 주도한 바라바지.”
여리고를 지나니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누런 산들이 탑 같은 모양을 드러낸다.
쿰란은 예루살렘에서 10Km 정도 동쪽에 위치했고 여리고와 유대 광야를 위아래로 끼고 있었다.
에세네파들은 유대 광야에서 세례 요한처럼 극기 훈련도 하며 쿰란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바라바가 루브리아에게 받은 베이지색 캐시미어 목도리를 두르고 빌립 선생의 집에 도착한 것은 월요일 늦은 오후였다.
“아, 바라바, 어서 와. 이렇게 와줘서 고맙네.”
선생은 바라바를 반갑게 맞으며 거실로 안내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동안 별고 없으셨지요?”
“음, 우리가 만나지 한 3년 되었나?”
“네, 저의 가게 개업식 때 오셨으니까 그렇게 되었지요.”
“요셉 선생님의 건강은 좋으시지?”
“네, 괜찮으십니다. 선생님 건강도 좋으시지요?”
“난 이제 나이도 있고 바깥출입은 잘 못 하네.
언제 하나님이 부르실지 그날만 조용히 기다리고 있지.”
“무슨 말씀을요, 제가 뵙기에는 아직 건강하신데요.
앞으로 20년은 문제없으시겠어요.”
“하하, 여하튼 이제 여러 가지를 좀 정리할 때가 되었네.
자네 아버님께 여기 와서 할 일에 대해 들었지?”
“네, 우리 에세네파의 역사와 생활 규범 또 우리가 믿고 지키는 율법의 말씀을 비밀리에 보관하실 계획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 잘 알고 있네. 요셉 님이 설명을 잘해 주셨군.”
“네. 그리고 보관 장소는 일반 사람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곳으로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여기 오면서 봤겠지만, 험한 바위산 중턱에 동굴들이 있는데 그 안에 보관할 계획이네.”
“네, 그러시군요. 저 혼자 가나요?”
선생이 막 대답하려는데 거실문이 열리며, 어떤 젊은 남자가 손에 무언가를 잔뜩 들고 들어왔다.
“서로 인사하지. 얘는 내 손자 호란이야.
나이가 호란이 서너 살 아래니까 앞으로 형으로 부르면 될 거야.”
호란이 들고 들어온 물건들을 테이블에 놓은 후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바라바 형님, 할아버지께 말씀 들었어요. 잘 부탁드려요.”
나이에 비해 성숙한 인상이었다. 손을 내밀며 바라바도 말했다.
“그래요. 만나서 반가워요.” 호란의 손이 단단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이 인사하는 것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본 빌립 선생이 바라바에게 물었다.
“여기서 일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갈 건가?”
“네, 내일 저녁까지는 도착해야 합니다.”
“유월절 행사에 참석하는 건가?”
“네, 몇 가지 중요한 일이 좀 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을 시작하면 시간은 넉넉할 거야.
여기서 마차로 한 시간이면 충분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우리 에세네파는 자네도 알겠지만, 사두개파와 다른 달력을 쓰니까 이번에 예루살렘에 가지는 않네.
우선 호란이 가지고 온 것들을 좀 보여 줄게.”
빌립 선생은 테이블 위에 있는 두루마리 쪽지를 펼쳐 보였다.
파피루스에 깨알같이 적혀 있는 에세네파 고유의 율법해석 책이었다.
이런 무더기가 세 덩이였고 또 하나는 좀 다른 것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니 얇은 동판에 철필로 무언가 쓰여 있고 그 동판들이 두루마리처럼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선생이 외투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펼치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 지도에 표시한 곳이 내일 가서 작업할 곳들이네.
모두 네 군데인데 지형이 험해서 접근이 쉽지 않아요.
두 사람이 잘 협력해서 해야 할 거야.
그리고 이 장소는 여기 있는 우리 세 사람만 아니까 보안 유지에도 각별히 신경 쓰기 바라네.
앞으로 내가 세상을 떠나면 둘이 상의해서 믿을 만한 사람 한 사람에게만 더 알려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