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 있는 헤롯 궁전의 거실 창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장터가 보인다.
장사치들은 식수도 팔고 무화과 열매에서 양고기구이까지, 대목을 앞두고 뭐든지 팔고 있다.
평상시 인구가 10만도 안 되는 이 거룩한 도시는 100만의 순례객을 맞을 채비를 위해 들떠 있었다.
화려한 복장을 한 이집트 여인들, 갈릴리에서 온 어부들, 돈을 받고 경호를 하는 이방인 병사들도 눈에 띄었다.
그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말 중에 히브리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유월절 강의를 준비하는 율법 학자들도 분주히 움직였다.
그들은 백색 모자에 헐겁고 긴 옷을 입고 다녔다.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은 역시 축제를 주관하는 제사장들이었다.
그들은 모자 이마 부분에 파란색과 금테를 둘렀고 긴 겉옷에는 장식용 술과 방울들이 달렸다.
겉옷 위에는 망토를 걸쳤고 화려한 보석이 박힌 율법 상자를 들고 다녔다.
어떤 장식용 술에는 청색 끈이 달려 있기도 했는데 율법서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율법서를 찾아 읽어 본 헤롯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나왔다.
헤로디아를 처음 보았을 때 눈과 마음의 욕심에 빠져 사촌 동생의 여자를 빼앗는 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또 여호와의 십계명을 기억하기는 쉽지만 행하기는 어려워, 자기는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 옛날 애굽을 탈출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은 올해도 또 돌아오고, 헤롯은 이 궁전의 주인으로 30년을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여리고 별장에서 잠시 쉬다가 유월절 준비도 점검할 겸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그동안 유대의 분봉왕으로 큰 분란 없이 왕권을 유지한 것은 안나스를 비롯한 왕당파 사두개인들의 공로가 컸다.
30여 년 전 선친 헤롯 대왕이 돌아가시자 그 혼란을 틈타 갈릴리의 유다라는 폭도가 큰 혼란을 일으켰으나, 로마 군대가 들어와 모두 처형한 후 아직까지 전국적인 유혈 사태는 없었다.
헤롯의 마지막 인생 목표는 그의 아버지 헤롯 대왕처럼 유대 땅 전체를 다스리는 왕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결정적인 열쇠는 로마 황제가 쥐고 있고, 연로한 황제는 헤롯에게 호의적이다.
하지만 헤롯의 형제이자 골란 고원 쪽의 분봉왕인 빌립이 살아 있는 한 그 꿈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그의 건강이 안 좋다는 소문도 있지만, 골골하면서 오래 사는 사람도 많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거실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들어오게.”
“소신을 부르셨습니까, 전하.”
“그래, 그동안 별일 없었나?”
들어온 사람은 왕실 자금관리 담당인 구사였다.
“네, 전하. 자금 집행도 차질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음, 왕비가 하시고 있는 일은?”
“네. 며칠 전 왕궁으로 금괴 100달란트가 들어왔습니다.”
헤롯은 왕비가 안나스 대제사장과 하는 일을 깊이 개입하지는 않았으나, 돌아가는 사항은 구사를 통하여 보고 받고 있었다.
실은 이번에도 금괴가 움직일 때 일부러 자리를 비우기 위해 여리고 별장으로 휴가차 간 것이다.
오랜 기간 집권하면서 그가 배운 교훈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일은 다른 사람을 시키고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헤로디아는 꼭 필요한 파트너이다.
나중에 로마 황제의 조사가 나와도 헤롯이 없을 때 왕비가 한 것으로 변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랬구먼. 생각보다 많이 움직였네?”
“네. 그렇습니다.
소신이 알기로는 왕비 님께서 왕실 금고 100달란트를 합쳐서 200을 일반 화물처럼 포장하여 로마로 이송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헤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200이라면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100, 칼리굴라에게 100을 줄 생각일 것이다.
역시 헤로디아의 손이 크다고 생각하며 구사에게 말했다.
“물론 이 일은 나는 모르는 일일세.”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하는 여리고 계셔서 실지로 모르셨지요.”
구사가 헤롯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했다.
“오늘 부른 것은 어제 꾼 꿈 때문인데 한번 들어보고 해석해 보게나.”
헤롯이 구사를 심복으로 둔 것은 몇 년 전 구사의 꿈 해몽으로 위기를 모면했기 때문이다.
꿈에서 궁전 기둥에 금이 갔는데, 그날 예정되었던 헤롯의 지방 시찰을 구사가 중지시킨 것이다.
그날 그곳에서 지진이 나서 수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후 구사는 승진을 거듭하여 왕의 거실에 들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측근이 되었다.
거실 문고리를 잡는 사람이 실세였다.
헤롯왕이 어제 꾼 꿈 이야기를 시작했다.
*민수기 15장 36-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