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카잔이 누보의 집을 찾아왔다.
누보의 어머니가 주름진 손으로 카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카잔 님, 우리 누보를 어려울 때마다 도와주셨다는데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은혜는요, 제가 누보를 좋아해서 한 일입니다.”
“이렇게 직접 뵈니까 아주 미남이시고 콧수염도 멋있네요.”
“하하, 고맙습니다.”
“엄마, 이제 그만하시고 먹을 거나 가지고 오세요.”
“오, 그래. 이거 집이 너무 누추하고 작아서 미안해요. 잠깐만 기다려요.”
누보의 집은 흙벽돌로 된 직사각형 방 하나밖에 없고 부엌이 뒤쪽으로 붙어 있었다.
어머니가 부엌으로 나가자 누보가 카잔에게 양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주머니를 열어 본 카잔이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많은 돈을 받아도 될까?
당분간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
“형님이 도와주신 걸 생각하면 약소하지요.
어서 집어넣으세요.”
카잔이 망토 속으로 은전 주머니를 넣은 후 콧수염을 한번 만지고 말했다.
“어머니께서 티베리아 쪽에 집 좀 알아보셨나?”
“네. 방 3개에 마당도 넓은 집이 많이 나와 있대요.
며칠 내에 엄마와 같이 가서 몇 개 보고 정하려고 해요.”
“응, 그래. 시간 맞으면 나도 같이 가서 봐 줄게.
그 동네 주택 단지 중에 날림 공사 한 곳이 많아서 겉은 대리석 좀 발라 놓았지만, 겨울에 비 오면 물이 줄줄 새지.”
“아, 그렇군요. 꼭 같이 가주세요.
엄마도 좋아하실 거예요.”
음식을 부엌에서 들고 들어오는 어머니가 누보의 소리를 들었다.
“뭐 또 기분 좋은 일이 있나 보다?”
어머니가 작은 식탁 위에 음식들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카잔 형님이 티베리야 집 보러 같이 가신대요.
그쪽 집들을 잘 아세요.”
“아, 고마워요. 집도 잘 보시나 봐요.”
“집뿐만이 아니에요. 로마나 그리스 역사에 대해서도 훤하세요.
앞으로 시간을 내서 더 좀 배워야겠어요.
유리와 대화를 하려면 그런 지식이 필요하지요.”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유리가 누구니?”
“아, 그런 여자 있어요.
나중에 보시게 될 거예요.”
“얘는 나한테 비밀도 많다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 지도 말 안 하고, 여자 친구는 있는지도 몰랐어요.”
고자질하듯 카잔에게 말하는 어머니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걱정 마세요. 누보가 잘하고 있고 이제 곧 며느릿감을 데리고 올 거예요.”
“아, 그래요. 우리 누보 장가가는 거만 보면 내가 여한이 없지요.
자, 어서 와서 드세요. 귀한 손님 오신다고 이것저것 했는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벌써부터 맛있는 냄새가 진동해서 참고 있는 중입니다.”
누보와 카잔은 식탁에 앉아 허겁지겁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 음식 솜씨는 이 동네 최고일 거예요.”
“그래. 정말 맛있네. 오랜만에 많이 좀 먹어야겠다.
어머니도 좀 드세요. 통 안 드시네요.”
카잔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나는 두 사람이 맛있게 먹는 거 보는 게 더 배불러요.
그런데 카잔 님은 결혼하셨지요?”
카잔이 먹던 빵을 꿀꺽 삼킨 후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결혼 안 했습니다.”
“아니, 그럼 아직 총각이란 말이에요?”
“호적상은 그렇지요.
실은 딸이 하나 있습니다.”
누보가 식탁에 박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세요? 전혀 몰랐어요.
몇 살이에요?”
“음, 지금 11살, 살아 있으면….”
카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 무슨 사연이 있었군요. 내가 공연히 물어봤네.
그 이야기는 식사 다하시고 나중에 하세요.”
어머니가 미안해하며 양고기 찜 그릇을 카잔 앞에 밀어 놓았다.
“네, 그러지요. 이 양고기 참 연하게 잘하셨네요. 정말 맛있어요.”
“우리 엄마가 양고기 찜을 참 맛있게 하세요. 저도 아주 오랜만에 먹네요.
우리 이사 가면 카잔 형님 좀 자주 오세요. 덕택에 저도 좀 먹게요. 하하.”
누보의 웃음소리가 채 끝나기 전에 누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
“어, 누굴까? 지금 올 사람이 없는데.”
어머니가 일어나 나가 보려는 것을 누보가 재빨리 일어나며 말했다.
“잠깐만요. 내가 누군지 볼게요.”
누보가 소리 안 나게 까치발로 문 앞에 가서 문틈 사이로 눈을 대고 보았다.
카잔이 긴장하며 망토 속 칼을 잡으려 했는데 물컹하고 아까 받은 주머니가 잡혔다.
오늘따라 칼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누보가 카잔과 어머니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제가 아는 분이 오셨어요. 어휴 놀라라!”
누보가 문을 열어주며 반가워했다.
“레나 님, 웬일이세요. 저의 집에 다 오시고?”
“빨리 피해야 해요.”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에게 레나를 소개해 주려던 누보가 또 한 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요?”
“마나헴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그녀의 입에서 누보가 걱정하던 말이 튀어나왔다.
“아, 우리 집을 아나요?”
“지난번 누보가 적어준 주소가 바로 이 근처라서 지금 그 집을 중심으로 가까운 집을 계속 수색하고 있어요.
마나헴과 우르소가 나가자마자 내가 지름길로 뛰어온 거예요.”
카잔은 직감적으로 우르소가 그때의 황소라는 것을 알았다.
“어서 피하는 게 좋겠다.”
카잔이 누보에게 말했다.
“그래, 빨리 피해야 해요.”
레나가 계속 숨을 몰아쉬며 서둘렀다.
누보의 어머니는 식탁에서 일어난 채로 계속 서 있다가 누보에게 물었다.
“저 인도 여자분은 누구시니?”
“나중에 말할게요. 지금은 우선 모두 피해야 해요.
부엌으로 빠져서 뒷문으로 나가지요.”
“그래, 그런데 먹던 음식이라도 치우고 가야지.”
“지금 그럴 시간이 없어요.” 레나가 야단치듯 말했다.
“네, 엄마. 지금 나가야 해요.”
누보가 어머니의 팔을 잡고 급히 부엌으로 나가다 문득 멈추었다.
“카잔 형님, 엄마 모시고 호텔 방에 먼저 좀 가 계세요.
레나 님도 먼저 나가세요. 저는 곧 따라갈게요.”
누보는 이제 이 집에 못 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앞마당에 묻어 놓은 은전 상자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