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스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왕비님. 약 백 년 전 폼페이우스 장군이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우리가 큰 수모를 겪었지요.
심지어 지성소에도 그가 혼자 들어간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참담한 행위를 한 폼페이우스는 결국 권력을 읽게 되었지요.”
왕비는 이 노인이 서론이 길면 상당히 중요한 말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나스는 허연 눈썹을 모으고 침을 한번 꿀꺽 삼킨 후 말을 계속했다.
“당시 우리가 당한 많은 일 중 가장 가슴 아픈 일이 대제사장 의복을 뺏긴 일입니다.
이 옷은 지금 로마의 전리품 창고에 있다고 합니다만, 어디에 쑤셔 박혀 있는지 생각할수록 망극합니다.
이것을 로마가 하루속히 돌려주어서, 우리 대제사장이 당당히 다시 입고 여호와께 영광 돌릴 수 있도록 왕비님께서 도와주시옵소서.”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듯 엄숙히 말하는 안나스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저도 그 사건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도로 가지고 와야지요.
대제사장복이라는 상징적 의미는 말할 것도 없고, 의복 전면에 부착한 루비와 금장식은 솔로몬 왕 시대부터 내려오던 것 아닙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협조해 줘야 할 빌라도 총독께서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아, 그분은 요즘 로마에서 정치적 입지가 흔들려서 무슨 일도 적극적으로 안 할 거예요.
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이 일은 아마 누군가 황제 폐하의 허락을 직접 받아야 이루어질 수 있을 텐데….”
안나스는 왕비가 도와줄 마음이 있으니 일이 성사될 것으로 생각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누보가 카잔의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말했다.
“형님도 들으셨지요? 나발이 이제 유리를 만나지도 않을 거라고 해요. 하하.”
기분이 좋아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음, 그래 들었지. 자네에겐 잘된 일이네. 유리가 문제이긴 하지만….”
“여하튼 나발의 생각을 제가 유리에게 알려주고 제 마음을 받아 달라고 해야지요.”
“응, 잘해 봐. 나도 옆에서 도와줄게.”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의 집에 얼른 한번 오세요.
제가 드릴 것도 있고 어머니와 인사도 하시지요.”
“그래. 곧 어디로 이사한다고 하지 않았나?”
“네. 어머니가 지금 티베리아 쪽으로 새집을 보러 다니세요.
예전에 카잔 형님이 거기 계셨다고 했었는데, 어떤 도시인가요?”
“티베리아는 하얗고 깨끗한 집이 많은 신도시인데, 나도 목수로 거기서 몇 년 일했었지.
티베리우스 황제의 이름을 따서 만든 도시로서 연극이나 음악회를 위한 문화시설도 많고,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니까 술집 같은 유흥시설도 많아.”
“아, 그렇군요. 재미있겠네요.”
“응, 지금 집값도 폭락하고 있으니까 마음에 드는 집을 쉽게 구할 수 있을 거야.
티베리아 생각을 하니까 거기서 만난 아주 특이했던 목수 한 사람이 생각나는군.”
“특이한 목수요? 어떤 사람인데요?”
“처음에 몇 번 만날 때는 잘 몰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엄이랄까, 따르지 않을 수 없는 힘이 느껴졌어.
나이는 나보다 어린 사람이었는데 유대 율법서를 훤히 꿰뚫고 있었지.”
“아, 그래요. 근데 뭐가 그리 특이했나요?”
“음, 하루는 동네 건달들이 와서는, 아주 추운 날씨였는데 우리가 입고 있던 외투를 달라고 시비를 거는 거야.
여기서 일하려면 돈이나 옷을 내야 한다면서….”
“그래서요?”
“당시 우리는 다섯 명이었고 건달들은 네 명밖에 안 되었어.
나는 옆에 있던 친구와 눈빛을 교환한 후 몰래 손으로 벽돌 한 장을 잡고 천천히 일어났지.
여차하면 한판 붙어야 할 테니까. 그때만 해도 내가 한 성질 했었지.”
“네, 그러니까 10년도 더 된 일이지요?”
“그렇지. 그래서 벽돌 잡은 오른손을 뒤로 감추고 몇 걸음 걸었는데, 바로 그 목수가 나보다 한발 앞서 나가 자기의 외투를 벗어 주는 거야.
그런데 그 태도가 너무 의연하고 마치 사랑하는 가족에게 주듯이 주었어.
건달들도 의아했는지 외투를 받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서 있었지.
그랬더니 그 목수가 이번에는 속옷까지 벗어서 주는 거야.
그때 내가 몇 발자국 옆에 있었는데 얼굴에서 환한 빛이 나는 거 같았어.”
“아, 그래서요?”
“그랬더니 그 건달 두목 같은 놈이 받았던 겉옷을 돌려주고 아무 말 없이 돌아갔어.
그 후에 그 목수를 내가 또 보지는 못했어.
원래 매일 오던 일꾼은 아니고 사람이 부족할 때만 부르던 목수였거던….
이름이 아마 예수였었지.”
“그랬군요. 세상에 그런 사람도 있네요.
그 후에 전혀 그 사람의 소식은 못 들었나요?”
“음, 실은 얼마 전 내 고향 사마리아에 있는 야곱의 우물을 어느 유대 랍비가 지나다, 그 물을 마시면서 벌어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 사람이 그때 그 목수였던 것 같아.”
누보가 짧은 감탄사와 함께 질문했다.
“아, 유대인이 사마리아에 있는 우물물을 마시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네요.
그때는 또 어떤 일이 있었나요?”
“유대인도 사마리아인을 싫어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을 더 싫어해.
마을 촌장이 나와서 그 유대 랍비에게 물을 떠준 여자는 물론, 옆에 있던 사람들을 호되게 야단쳤다더군.”
누보는 카잔의 다음 말이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