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호텔은 그리 멀지 않았다.
유리가 먼저 앞서서 걸었고 나발은 조금 뒤에서 따라갔다.
혹시 누가 미행하는 사람이 있나 보았는데 수상한 사람은 없었다.
그녀를 따라가다 보니 늘씬한 그녀의 뒤태가 남자들의 시선을 끌게 생겼다.
유리가 들어가 로비에 앉았다. 잠시 후 나발도 따라 들어갔다.
“조심성이 참 많으시네요. 누구 원수진 사람이 있나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요.”
“네, 맞아요. 여기 처음 들어와 봤는데 정말 좋네요.
바닥도 대리석이고 벽도 번쩍번쩍해요.”
신이 나서 말하는 유리가 순박해 보였고, 통통한 볼살도 더 귀여워 보였다.
“차는 뭐로 드실까요?”
“아무거나 나발 님 좋은 거로 시켜 주세요.”
“걷느라고 좀 덥기도 하니까 포도 주스로 할까요?”
“네, 좋아요.”
나발이 종업원을 불렀는데 마침 전에 같이 호텔에서 일했던 사람이었다.
“나발, 오랜만이네. 요새 왜 일하러 안 와?”
“아, 요즘 다른 호텔에 일들이 많아서…”
나발이 유리가 못 보게 윙크를 하며 말하자 그가 싱긋 웃으며 주문을 받아갔다.
“집에서는 어머니와 두 분만 사시나요?”
“아니에요. 안에 다른 분이 계세요.”
“그렇군요. 꽤 집이 큰데 그렇겠지요.
친척이 같이 있나요?”
“친척은 아니고 우리 모녀를 도와주시는 분인데, 안나스 제사장님 밑에서 일하세요.”
“지금 대제사장은 가야바님이지요?”
“네. 실지로는 안나스 님이 뒤에서 다 조종하신대요.
가야바님이 안나스 님의 사위시거든요.”
“아, 그렇군요. 집에 같이 계신 분은 어떤 일을 하세요?”
“잘은 모르겠는데 비밀 경찰인가봐요. 마나헴이라는 분인데 강도나 폭도들을 잡는다고 해요.”
경찰이 열성당을 부를 때 강도나 폭도라고 하는 것을 나발은 알고 있었다.
“네. 그럼 아주 좋은 일을 하는군요.”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나발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지요.
그런데 가끔 유대민족의 독립을 위해 애쓰는 사람을 강도라 하고 잡는 경우도 있다네요.”
나발이 속마음을 숨기며 유리의 반응을 살폈다.
“네, 저도 누가 옳은지 어떤 때는 잘 모르겠어요.”
포도주스를 가지고 온 나발의 친구는 아까보다 훨씬 공손하게 주스 두 잔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나발은 친구와 잠깐 할 말이 있다며 일어나 로비 밖으로 나갔다.
“야, 저 얼굴이 까무잡잡한 여자 괜찮네!”
“음, 지금 중요한 일로 비밀 대화를 해야 해. 빈방 하나 있니?”
“알아볼게. 잠깐 들어가 기다리고 있어.”
나발이 로비로 돌아와 보니 유리가 주스를 안 마시고 기다리고 있었다.
“왜 먼저 마시지 안 마셨어요?”
“아니에요. 나발 님이 오시면 같이 마시려고요.”
얌전하게 웃는 유리의 통통한 볼이 더욱 이뻐 보였다.
백부장 루고는 다음날 일찍 아단을 불렀다.
“어제 자네 편지 잘 읽었네. 그렇게 마음고생이 심했었구먼….”
“네, 죄송합니다. 저로서는 너무 괴로웠습니다.”
“아니야. 나도 어제 자네 편지 읽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어.
내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천만에, 이제 걱정하지 말고 힘을 내게. 내가 도와줄게.”
아단은 눈물을 글썽이며 두 손으로 루고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백부장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그런데 지금 이 일을 자네 형은 알고 있나?”
“전혀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 지방에 가 있습니다.”
“오, 그래. 말 안 하기 잘했네. 형은 언제 돌아오나?”
“내일모레 올 겁니다.”
“형이 장사하는 지방에 가서 근무하고 싶다고 했지?”
“네. 이번 일을 정리한 후 그렇게 되면 참 좋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내가 로무스 대장님께 잘 말씀드리지.
지난번 승진도 건의했는데 곧 해 주신다고 했으니까 승진돼서 갈 수도 있지.”
“감사합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저 때문에 그런 사고가 있었는데 승진이 될까요?”
“그럼. 고의가 아니었으니까 단순 사고 처리될 거야.
자네는 아직도 형과 단둘이 전에 살던 곳에서 살고 있나?”
“네, 그렇습니다. 이제 이사 갈 준비를 해야지요.”
“음, 그렇게 해야겠구먼. 그럼 사라는 언제 찾아갈 생각인가?”
“내일이라도 가서 잘못을 말씀드리고 용서를 빌어야지요.
빨리 속죄를 해야 제가 숨을 제대로 쉬고 살 것 같아요.
아, 물론 백부장님 말씀은 전혀 안 하고요.”
“음, 그래. 그럼 어떻게 얘기하는 게 좋을까?”
“네. 그러니까 그 긴장이 풀리는 향초를 제가 혼자 생각에 사무엘 님을 드린 거로 해야지요.
생선 주신 것이 고마워서 답례로요.
그런데 알고 보니 배합을 잘못해서 치명적인 독이 나오게 되었다고요.”
“음. 그렇게 얘기하면 되겠네. 그럼 이만 돌아가서 일하도록 하게.”
아단은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그날 밤늦게 아단이 혼자 자는 숙소에 검은 복면을 한 괴한이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들어왔다.
아단이 자고 있는 방문을 살며시 열고 촛불을 몇 개 킨 후 그의 편지에서 오려낸 작은 쪽지를 머리맡에 놓고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며 루고는 생각했다.
아무리 도와주려 해도 어리석은 사람은 정말 어쩔 수 없다.
생각해 보니 아단이 불쌍해서 눈물이 조금 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