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식은땀이 이마에서 흘렀다.
사라가 몰래 루브리아의 침실로 들어가니, 유타나가 침대에 누워 있는 루브리아의 눈을 간호하고 있었다.
유타나는 사라가 들어 온 것을 못 보았다.
살며시 다가가 보니 눈에 약초를 대고 있는 루브리아는 색색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그 옆에 약초 통이 2개 있는데 파란 통에는 ‘약’이라고 써 있고 검은 통에는 ‘독’이라고 쓰여 있었다.
왜 여기 독이 있냐고 물어도 유타나는 대답을 안 했다.
이상하게 그녀는 사라가 안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옆에는 눈 마사지하는 송곳 같은 도구도 있었다.
루브리아를 깨우려다 너무 곤히 잠든 것 같아 그냥 나오려는데, 유타나가 하품을 하며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사라는 마음을 바꿔 루브리아의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루브리아는 여전히 가볍게 코를 골며 잠에 빠져 있었다.
만약 그녀가 실명을 한다면 바라바가 결국 자기와 결혼하자고 할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이 독이라고 쓰여 있는 약통에 다가갔다.
통 뚜껑을 살며시 여니 검은색의 약이 소복이 담겨 있었다.
손이 좀 떨렸으나 약을 집어 들고 냄새를 맡았는데 놀랍게도 아버지 방에서 맡았던 향초 냄새가 났다.
얼른 도로 집어넣다가 주위를 살핀 후 다시 조금 꺼냈다.
이 독약만 루브리아의 눈에 대면 바라바를 차지할 수 있다.
사라가 루브리아의 왼쪽 눈에 독약을 대려는 순간, 누가 침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 왔다.
바라바 오빠였다. 그가 눈에 안대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들어온 것이다.
“바라바 오빠, 눈이 왜 그래?”
사라가 놀래서 물었다. 바라바는 사라의 목소리를 듣고 대답했다.
“응? 내 눈이 어때서?”
“오빠는 지금 안대를 해서 눈이 안 보이잖아.”
“아냐. 난 눈을 감고도 다 볼 수 있어. 너도 그럴 수 있어.”
그러면서 바라바는 까만 약통의 약을 한 움큼 집어서 사라의 눈에 대려고 했다.
“그 약은 독이야” 하며 크게 소리를 지르다 꿈에서 깨어났다.
너무나 생생한 꿈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꿈에서 한 행동이 몹시 부끄러웠다.
백부장 루고가 아버지와 아단을 죽인 살인자지만, 자신도 루고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꿈이었기에 정말 다행이었다.
마음을 좀 가라앉히기 위해 가슴을 내밀며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생각해 보면 마음속 깊은 구석에 루브리아 언니에 대한 미움이 숨어 있었다.
사라는 이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 고개를 좌우로 빨리 저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계셨으면 참 좋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아버지가 쓰신 글을 펼쳐 보았다.
주제별로 정리하셨는데 제목이 ‘거룩한 사람’이었다.
<거룩한 사람: 거룩이란 말은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유대 경전에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는 말씀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은 거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이 정도면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미 거룩하지 않다.
인간은 결코 거룩한 존재가 아니고, 거룩에 한 걸음씩 다가갈 뿐이다.
누가 거룩에 가까운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나는 거룩도 좋지만 기쁨이 더 좋다.
사는 것은 기쁜 것이다.
기쁨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장 바람직한 인간의 상태이다.
그러니 혼자 있을 때도 자신을 갖고 기쁨에 넘쳐 살아라.
그분의 소리는 더욱 잘 들리고, 그분의 빛은 더욱 빛날 것이다.>
글은 거기서 끝나 있었고, 이 며칠 후 세상을 떠나신 것 같았다.
사라는 아버지가 열성당 일을 하시면서 어떻게 이런 글을 쓰셨는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솟구쳤다.
유리의 미소 머금은 눈이 나발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엄마가 그러는데 나발 님은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거라고 하셨어요.”
“그래요?”
누보가 한 보자기 싸 갔는데도 양고기가 좀 남았다.
나발은 말을 아끼며 유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먼저 살폈다.
“네, 저도 처음 뵈었을 때부터 인상이 참 좋았어요.
나발 님은 무슨 일을 하세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발은 미리 생각해 두었다,
“네, 저는 광장호텔 같은 곳에 여러 물건을 납품하며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 그 시장통에 있는 큰 호텔요?”
“네. 그렇습니다.”
“와! 그 호텔과 장사를 하시면 그 호텔에 자주 가시겠네요.”
“그럼요. 그 호텔 로비에 가서 차 한잔하실까요?”
“어머, 정말요? 거기 가보고 싶었는데, 지금 갈까요?”
“아니요. 이 고기 좀 더 먹고 가지요.”
“네. 나발 님, 다 드세요.
저는 요즘 고민이 많아서 식욕이 없어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나발 님 앞이라 많이 먹지를 못하나 봐요. 호호.”
나발이 고기 한 덩어리를 바쁘게 꿀꺽 삼킨 후 물었다.
“유리 씨는 점성술 가게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되셨나요?”
“네. 제가 16살 때부터니까 벌써 3년이 넘었네요.
어머, 그러고 보니 제가 벌써 19살이 되었어요. 나이가 너무 많지요?’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한참 이쁘게 피는 꽃봉오리인데요.”
“호호. 나발 님이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눈물이 날려고 하네요.”
유리는 이슬이 조금 맺힌 눈으로 나발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엄마 밑에서 점성술만 배우고 학교도 못 다녔어요.
또 인도 사람이라 어디 가서 어울리고 재미있게 놀아 본 적도 별로 없고요.
사실 나발 님 같은 젊은 분과 이렇게 만나는 것도 처음이에요.
나발 님은 혹시 애인 있으신가요?”
“아, 저도 없어요. 근데 인도에서는 어떤 종교를 믿나요?”
나발은 화제를 바꿨다.
“네, 저희는 힌두교를 믿고 있어요.”
“음, 그리고 이런 질문드리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괜찮아요. 무슨 말씀이든 하세요.”
“점성술은 미래를 정말 잘 맞추나요?”
“그런 질문 하실 줄 알았어요.
가끔 다른 사람의 생각은 읽더라고요.
그리고 사실 미래라는 것도 다 사람이 맘먹기 달린 것 아니겠어요?”
“네, 그렇긴 한데…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읽나요?”
“잘 모르겠는데 엄마는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정신 집중을 하면 뭔가 느낀다고 해요.”
나발은 레나가 손을 잡자고 하면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네, 그러시군요. 이제 다 먹었으니 호텔 가서 차 한잔하실까요?”
“네. 그래요.”
유리가 신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