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스 제사장은 돈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의 재산을 압류할 때, 절대로 겉옷은 뺐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겉옷을 이불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추운 날씨에는 더 조심해야 한다.
이제 곧 성전의 외벽까지 완공되면, 헤롯 대왕 때부터 다시 짓기 시작한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이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되찾게 된다.
이렇게 넓고 화려한 성전에서, 곧 다가올 유월절 축제를 치르게 될 것이다.
지난 세월 헤롯 왕과 호흡을 맞추며 여기까지 온 것을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은 유월절에 많은 군중이 모일 때 불순분자들이 나타나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정보에 의하면 몇 명의 불순분자들이 올해도 올 것 같다는데, 주변 도시부터 미리미리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특히 예수라는 랍비는 서민들뿐 아니라 일부 바리새파 사람들 사이에서도 환영을 받는다고 한다.
이렇게 인기가 높은 사람은 체포하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만약 성전이 혼란스러워져 질서가 무너질 것 같으면, 로마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안토니아 성채에서 이를 제압하러 군인들이 즉각 출동한다.
이렇게 되면 헤롯 왕의 위신도 손상되고 대제사장의 직위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가장 피해야 할 상황이다.
로마는 유대인들을 다른 점령국 민족보다 비교적 관대하게 다루어, 유대인 대제사장과 입법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를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로마와 유대가 충돌하는 부분도 있었으니, 유대인들이 매년 2드라크마씩 성전에 내는 성전세를 로마가 간섭하고 감시권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빌라도가 몇 년 전 부임하여 예루살렘에 수도시설 공사를 하겠다는 명목으로 성전 금고에 손을 대려다 유대인들의 거센 반발로 포기한 일이 있었다.
이때 빌라도는 화가 난 시민들에 포위되었다가 군인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갔다.
이후 헤롯 왕과 빌라도의 사이가 더욱 악화되었는데 성격이 거친 빌라도가 언제 또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
다행히 빌라도의 상관인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가 헤로디아와 친분이 두터워 방패막이가 되고 있었다.
여하튼 곧 외벽이 완성되면 모든 공사가 다 끝나는 대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뭐래도 헤롯 왕의 치적이고, 이 건축 사업을 오랜 세월 제사장으로 총괄한 안나스 자신의 빛나는 업적이다.
오늘도 이제 공사장을 둘러보러 막 나가려는데 누가 목발을 짚고 들어왔다.
갈릴리에 다녀온 마나헴이었다.
“다녀왔습니다. 대제사장님.”
안나스는 오래전 대제사장직에서 물러났지만, 주위에서는 모두 그렇게 불렀다.
“오, 그래. 잘 다녀왔는가? 그러지 않아도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지.”
“네, 감사합니다. 외벽 공사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자마자 벌써 확인했구먼. 나도 막 한 바퀴 돌아보려는 참인데 같이 가 볼까?”
안나스가 앞서 나가고 마나헴이 바로 뒤를 따랐다.
추운 날씨에도 인부들이 여러 명 나와서 외벽의 미장 공사를 하고 있었다.
60이 넘은 노인 안나스의 발걸음은 젊은 사람 못지않게 빨랐다.
마나헴이 힘들게 따라오는 것을 눈치 챈 그가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너무 빨리 걸었나? 그런데 자네는 목발이 왼쪽 발 아니었나?”
“네, 실은 이번에 오른 다리를 조금 다쳤습니다.”
“아니, 어쩌다 또 다쳤나?”
마나헴이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길을 걷다가 넘어졌습니다.”
“음, 빨리 나야겠구먼. 유월절이 다가오는데 자네가 치안 유지를 잘 맡아서 해야지.”
어제 오후에 마나헴은 지난번 왼 무릎을 치료해 준 병원에 갔었다.
의사는 안나스의 소개로 몇 달 전 봤던 것을 기억하고 친절하게 상처를 살펴보더니, 부러진 오른쪽 정강이뼈는 다시 붙어서 별문제 없다고 했다.
안나스가 성벽을 한 바퀴 돌더니 안토니오 성채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의 성채도 다시 지어서 높이를 좀 반으로 낮추면 좋겠어.
모든 움직임을 저 위에서 로마 군인들이 보고 있으니 기분이 별로 안 좋아.
성채 보안 책임자인 로마 백부장도 은근히 유대인을 무시하는 것 같아. 자네 생각도 그렇지?”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제 자네가 유월절에 성전의 질서를 철저히 지키면 저 사람들이 생각이 달라지겠지.”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나헴은 이번 유월절이 자기에게 승진의 기회로 다가온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안나스가 천천히 걸으며 회당으로 돌아왔고 마나헴도 그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며칠 전 헤롯 전하를 뵈었는데 예수라는 랍비에 대해 또 물어보시더군. 자네도 들어 본 적 있나?”
“네, 그 사람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는데, 요한이 죽자 제자들을 데리고 나와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고 술도 아무하고나 잘 먹어서 제법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음, 잘 알고 있구먼. 전하께서 신경 쓰시는 사람이라 가야바와 요나단에게 특별히 주시하라고 했지.
만약 이번에 와서 문제를 일으키면 빠져나가기 힘들 거야. 이미 산헤드린에서 무슨 계획을 세웠다고 하더군.”
“이번에 올까요?”
“음, 글쎄. 그가 만약 에세네파라면 이번에 안 오겠지.
에세네파는 음력으로 명절을 쇠지 않으니까.”
“네. 여하튼 저도 요나단 님과 함께 질서 유지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음, 그래야지. 그리고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네.”
눈을 지그시 감은 안나스의 얼굴에 한줄기 석양빛이 지나갔다.
천하의 안나스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었다.
수백 년간 대대로 입었던 대제사장 예복인 *에봇을 티베리우스 황제가 즉위한 후 로마에 빼앗긴 것이다.
이런 굴욕적인 조치를 당한 후 안나스는 스스로 대제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사위 가야바를 대제사장 자리에 앉힌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에봇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것이 안나스의 남은 소원이었다.
빌라도에게 넌지시 가능성을 타진해 봤으나 반응이 차가웠다.
헤로디아 왕비를 설득하여 시리아 총독에게 부탁하는 방법밖에 없다.
짧은 순간 여러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앞에는 마나헴이 목발을 짚고 아직 서 있었다.
“아니, 다음에 얘기하도록 하세. 빨리 다리가 완쾌되어야 하겠군.”
마나헴은 안나스의 주름지고 근엄한 얼굴에서, 유대민족을 이끄는 외로운 영웅의 그림자를 보았다.
*에봇(ephod) - 출 28:6-14, 29:5, 39:2-7, 레 8:7
대제사장이 그 직분을 행할 때 입는 거룩한 옷 중의 하나로, 소매가 없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앞치마 같은 모양의 옷이다.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 및 가늘게 꼰 베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었다.
앞판과 뒷판이 견대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어깨 견대에는 *호마노 두 개가 각각 붙어 있다.
*호마노 (sardonyx) - 줄무늬가 있는 오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