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보는 태어나서 이렇게 기분 좋은 적은 없었다.
공중을 나는 작은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도 누보의 앞날을 축하해 주는 것 같았다.
얼마 전 어머니께 마나헴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은전을 한 움큼 드리니, 놀라서 좋아하시는 모습이 떠오르며 절로 웃음이 나왔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이제 좀 떨치고 우리 집안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누보의 말에 어머니의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갈릴리 시몬의 독립운동 패거리에 들어간 남편이 어느 날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것은 누보가 한 살 때였다.
이 슬픈 이야기를 어려서 어렴풋이 전해 들은 누보는, 언젠가 큰돈을 벌어 아버지 때문에 고생하시는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었다.
이번에 빌라도 총독의 막사를 청소하면서 벌게 될 돈은 마나헴의 책상 밑에 있던 은전과는 비교가 안 될 것이다.
큰 성공 보수가 기대되는 이번 일이 잘되면 우선 새집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
방 두 칸짜리 집을 구하고 슬슬 결혼 준비도 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싶었다.
이상하게 청소를 하는 곳에 금고가 보이지 않았으나, 나발이 곧 어디 있는지 알려주리라 생각했다.
늘 만나는 호텔 로비에 도착하니 나발이 먼저 와 있었다.
“일찍 왔구나. 날씨가 참 좋지?”
누보의 밝은 인사에 나발의 반응이 별로였다.
“너 지난번 받은 돈으로 옷이라도 하나 사 입지, 옷이 이게 뭐니?”
“옷이야 뭐 아무거나 입어도 돼. 그 돈 어머니 다 드렸어.”
“그랬구나. 어머니가 좋아하셨겠다.”
“이게 모두 네 덕분이야. 앞으로도 일 좀 많이 시켜줘.”
“물론이지. 그리고 이거 받아.”
나발이 주위를 한 번 살핀 후 검은 나무 조각에 무언가 쓰여 있는 패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누보가 열성 당원이라는 단원 증명패였다.
“고마워. 이제 나도 정식 당원이구나.”
“응, 그래. 너는 비사부 소속이야.”
“비사부? 거기가 뭐 하는 곳인데?”
“비밀사업부인데, 앞으로 큰일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우리 조직을 챙겨 나가는 곳이야.”
“와, 대단한 부서구나. 내가 거기서 일을 잘할 수 있을까?”
“그럼,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 내가 부서장이니까.”
“아, 그렇구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발 부장님.”
누보가 벌떡 일어나서 인사를 하는 시늉을 하고 말했다.
“이제 드디어 네가 장군이 되는 길에 들어서기 시작했구나.”
“그래. 이제부터 내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거다.
어떤 장애가 있어도 유대 민족의 독립을 이루는 장군이 되어야지.”
“그럼. 너는 충분히 장군이 될 수 있을 거야. 나도 도울게.”
“그래, 고마워.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성공만 하면 크게 도움이 될 거야.”
나발은 독수리 깃발을 탈취하는 계획을 누보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누보는 이상하게 실망하는 눈치였다.
좀 더 이 작전의 중요성을 설명해 주려는데 유리가 로비로 들어왔다.
그녀는 오늘따라 화려한 자주색 옷에, 진분홍색 입술 화장으로 눈에 띄게 예뻤다.
나발은 일부러 누보를 좀 일찍 나오라 했는데 유리도 시간보다 조금 일찍 왔다.
“안녕하세요? 얼마 전 우리 집에서 밤에 뵌 분들 같은데 아닌가요?”
유리가 농담을 하며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네, 그날 시간도 늦었는데 실례가 많았습니다.”
나발도 맞장구를 치며 받아넘겼다.
“하하, 나는 무슨 얘기인가 했네. 그날 고생 많으셨지요.
저는 억지로 밧줄을 묶는데 유리 씨에게 미안해서 혼났어요.” 누보도 한마디 보탰다.
“다리가 아프신 분은 잘 지내나요? 무슨 이상한 낌새는 눈치 못 챘지요?”
나발이 목소리를 낮추어 유리에게 물었다.
“네, 병원에 며칠 입원하고 퇴원했어요. 곧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나 봐요.
엄마가 그러는데 별 의심은 안 하는 것 같다고 해요.”
“네, 다행입니다. 그래도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라 항상 조심해야 해요.
요즘 청소하는 일은 좀 익숙해지고 주위 사람들과도 친해졌나요?”
“네, 이제 어느 정도 손에 익었고 사람들도 조금 사귀었어요.”
나발이 유리에게 깃발 작전을 설명해 주고, 얼마 후 대규모 시위가 벌어질 텐데 이 시위의 성패가, 지금 여기 있는 누보와 유리 두 사람의 어깨에 달려 있다고 했다.
“그 독수리 깃발은 아마 빌라도 막사의 대회의실 중간에 세워져 있을 거예요.”
유리가 말하자 곧 누보가 거들었다.
“그래, 내가 주로 거기서 일을 하는데 거기 있어.
음... 그리고 이건 그냥 내 생각인데, 이왕 그런 일을 할 바에는 금고도 어디 있을 텐데, 그것도 같이 털면 어떨까?”
“금고는 총독 개인 사무실 어디 있을 텐데 아직 못 봤어요.”
유리도 관심을 보이며 거들었다.
나발은 누보가 금고에 대해 말할 때, 지금 금고에 신경 쓸 때가 아니라고 야단을 치려다가, 유리도 같이 언급하자 차분하게 타일렀다.
“음, 지금은 금고에 대해 신경 쓰면 안 돼요.
깃발부터 탈취한 다음 그때 다시 생각해도 늦지 않으니까.”
“아, 알겠어요.” 유리가 머리를 끄떡이며 얼른 수긍했다.
나발은 이쯤 해서 누보를 먼저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에게 눈을 껌뻑하며 신호를 주었다.
“아, 내가 가봐야 할 곳이 있네. 나 먼저 일어날게.”
눈치 챈 누보가 얼른 일어나 나갔다.
나발이 유리에게 슬쩍 한무릎 다가앉았다.
“어머니는 잘 지내시지요?”
“네, 이번 일도 잘되고 아주 기분이 좋으세요.
특히 제가 나발 님과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더니 아주 좋아하세요.”
“저하고 있었던 일이란 게 무슨 말씀이지요?”
“어머, 지난번 저하고 여기 위에 방에 올라가서요… 호호.”
“아, 난 또 무슨 말씀인가 했네요.”
“저는 어머니에게 모든 일을 다 말씀드려요.
어머니가 이제 저는 나발 님의 여자니까 끝까지 나발 님만 위해서 살라고 하셨어요.”
나발은 갑자기 부담을 느꼈다.
2층 방이 비어있지만, 올라가기 싫었다.
유리는 어디까지나 인도 사람이고, 점성술을 하는 여자라 결혼은 가당치 않고 잠시 즐기는 상대였을 뿐이다.
더구나 앞으로 자신의 지위가 올라갈수록, 순수 유대 혈통의 가문 좋은 여자가 장군의 아내로서 적합한 것이다.
“이거 조심해서 가지고 가세요.”
나발이 주먹만 한 가죽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이게 뭐예요?”
“지난번 고생도 많이 했는데 은전을 좀 넣었어요.
아마 몇 달간은 점성술 손님 안 와도 괜찮을 거예요.”
“어머나, 고맙습니다. 어머니 가져다드릴게요.”
주머니가 묵직했다.
유리는 이 남자를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