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유리를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꿈결에 어렴풋이 유리가 옆에 앉아서 다리를 주물러 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더니 얼굴을 가까이 대며 볼을 살살 비비는 것이었다.
기분 좋게 미소 짓는데 이상하게 볼이 갑자기 아파졌다.
눈을 떠보니 시꺼먼 복면을 쓴 놈이 볼을 손으로 잡고 뒤틀고 있었다.
깜짝 놀라 일어나려는 순간 놈이 몽둥이로 정강이를 내리쳤다.
뼈가 부러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큰 소리로 경호원을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복면을 한 놈이 한 명 더 있었다.
위기를 느끼고 목발 중간에 넣고 다니는 단도를 꺼내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니 놈들이 더는 덤비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곧 기어서 방 밖으로 나가 경호원의 방문을 열려고 했는데 가운데 끼어 있는 막대기를 발견했다.
문을 열고 소리 질러 그를 깨웠다.
술에 취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레나와 유리가 있는 방문을 열었다.
그들은 손이 묶여 있었고 입은 수건으로 물려 있었다.
촛불에 어른거렸지만, 유리가 무슨 봉변을 당한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경호원이 그들을 풀어주고 일단 안심이 되자 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통증이 느껴졌다.
다시 침실에 들어와서 누웠는데 사무실 책상 밑에 숨겨 놓은 은전 상자가 생각나 벌떡 일어나려다 다리가 아파 다시 주저앉았다.
레나가 가 보았더니 상자는 있는데 속은 텅 비어 있다고 했다.
다리도 너무 아팠지만, 가슴 속이 텅 비어 왔다.
지금 은전이 문제가 아니니, 빨리 의사를 불러오라고 레나가 경호원을 다그쳤다.
그가 잠시 후에 의사를 데리고 왔다.
의사는 잠이 덜 깬 채로 불려 와서 오른쪽 정강이에 피가 멎는 약초를 발라주며 뼈가 부러진 것 같다고 말했다.
왼 무릎이 나을 만하니까 이번에는 오른쪽이었다.
아침이 되자 들것에 실려 동네 병원으로 와서 치료를 받았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인데, 꿈만 같고 도대체 어떤 놈들이 감히 그런 짓을 했을까 생각해보니, 책상 밑에 숨겨 놓은 은전 상자를 쉽게 찾은 거로 봐서 내부를 아는 놈들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두 놈의 체구나 몸짓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구였더라 생각하는데 레나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거 참 큰일이네요. 중요한 일을 며칠 앞두고 이런 변을…”
“글쎄 말이요. 아이고 다리야. 말을 크게 해도 울려서 아프네요.
유리는 별일 없었지요?”
“네, 그럼요. 어제 너무 놀라서 지금 누워 있으면서도 마나헴 님 걱정만 하고 있어요.
결혼식은 아무래도 성전 공사 끝나고 돌아오시면 해야겠어요.”
“아, 웬만하면 그냥 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무리겠지요?”
“그럼요. 그리고 사실 죄송하지만 이번 사태는 제 책임도 커요.
제가 날짜를 더 나중으로 잡아야 했었어요.”
마나헴은 이게 무슨 소린가 하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처음 결혼 날짜를 잡으려 하실 때 제가 드린 말씀 기억나시나요?
너무 서둘러 날을 잡으면 안 되고 뭔가 큰일을 마치셔야 한다고...
마나헴 님의 별자리 근처에서 알 수 없는 붉은 별이 보인다고...”
“그래요. 기억이 나요. 그 붉은 별이 이런 문제를 일으켰고, 그 큰일이 바로 성전 공사였구나...”
재판은 정시에 시작됐다.
가야바가 재판장 복장을 하고 들어오자 모두 일어났다.
그가 중간의 큰 의자에 앉자 모두 따라 앉았다.
살인 재판이라 분위기가 무거웠다.
가야바는 50대 초반의 날카롭고 뚝심 있는 인상이었다.
상대편 변호사 좌석에는 중년의 노련해 보이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탈레스 선생도 중앙 증인석을 사이에 두고, 그 변호사와 마주 보고 앉았고 사라와 유타나는 증인석 뒤에 있는 일반 좌석에 앉았다.
가야바가 검사의 공소사실을 읽어 내려갔다.
그 내용은 그동안 루고가 아단을 시켜 사무엘 님을 살해한 동기와 방법, 그리고 이 범행을 저지른 아단마저 살해했다는 것으로 탈레스 선생이 쓴 고소장이었다.
다 읽은 후 가야바가 칼을 차고 서 있는 경호원에게 피고를 들어오게 했다.
루고가 포승줄에 묶여 들어와 변호사의 옆자리에 앉았다.
얼굴이 많이 수척했으나 어딘지 여유가 있어 보였다.
방청석을 돌아보는 루고의 눈이 사라를 잠시 머물고 지나갔다.
“피고인 루고는 검사의 공소 내용을 잘 알고 있지요?”
가야바가 루고를 보며 물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피고는 범행 사실을 인정하나요?”
“전혀 사실이 아니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루고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가야바는 피고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곧바로 말했다.
“그럼 변호사 변론해 주세요.”
루고의 변호사가 천천히 일어나며 가야바를 향해 정중히 머리를 숙인 후 변론을 시작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는 선의의 피해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피고는 몹쓸 마술에 걸려 정신을 잃고, 하지도 않은 일을 자백했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이 자리까지 온 것입니다.
피고 루고는 근위대의 백부장으로서, 지금까지 그의 모든 삶을 이 나라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해 바쳐 왔습니다.
그런데도 원고는 본인의 부친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난 후, 이를 저지른 범인을 오랫동안 잡지 못하자, 엉뚱하게 루고 백부장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순진한 백부장을 미혼향을 맡게 한 후, 횡설수설하는 불쌍한 피고를 구속하여 무리한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 민심을 어지럽히고 혹세무민하는 일들이 여러 마술사에 의해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귀를 조종하여 병을 낫게 한다며, 불쌍한 환자들 등쳐먹는 일을 주로 하는데, 이번 마술은 더욱 그 질이 나쁩니다.
애국적인 로마 시민이자 이 땅의 질서를 수호하는 로마 백부장을 엉뚱한 살해범으로 몰았기 때문입니다.”
변호사가 열변을 토하는 동안 루고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